두 아들 잃고도... 독립운동에 한 평생 바친 성균관대 창립자
[임재근 기자]
▲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 100번에 김환기의 묘. 김환기의 이름 위에는 ‘순국선열’이라고 적혀 있다.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출옥 후 사망했기 때문에 ‘순국선열’이라 부른다. 비석 옆면에는 부모형제의 가족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다만 김환기 선열의 출생 연도가 비석에 1902년으로 새겨진 것은 오기이다. 비석 제작 작업 중에 착오가 생겨 비석에 잘못된 연도가 새겨졌다. 김환기 선열의 출생연도는 조만간 1909년으로 정정될 예정이다." |
ⓒ 임재근 |
'마지막 선비', '유림의 거두'로 알려진 심산 김창숙은 세 아들 중 둘을 독립운동 과정에서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유교에서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불효로 여겼는데, 심산 김창숙은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심산 김창숙의 두 아들, 장남 김환기 지사와 차남 김찬기 지사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심산 김창숙은 슬하에 3남을 두었습니다. 1909년생 장남 환기, 1915년생 차남 찬기, 1918년생 3남 형기. 이제부터 심산 김창숙의 삶과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김창숙과 그의 아들들
심산 김창숙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기점은 1919년 3.1운동이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에는 개신교 인사가 16명, 천도교 인사 15명, 불교 인사가 2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유교에서는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독립운동에 유림의 책임을 느낀 김창숙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파리 장서)을 작성해 유림 대표 137명의 서명을 받아 전달하게 됩니다.
1919년 3월 27일 중국 상해에 도착한 김창숙은 서한문을 이미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보내어 회의에 참석하는 각 국가의 대표들에게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 김창숙의 생가.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
ⓒ 심산 김창숙 평전 |
일경의 고문, 19살 나이에 목숨 잃은 장남 김환기
김창숙이 망명길에 오른 지 7년쯤 지난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대구를 비롯한 영남 일대에서 유림 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1925년 봄, 큰아들 환기는 경북지방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들고 아버지가 머물고 있던 베이징으로 건너왔습니다. 당시 김환기의 나이는 불과 17살이었습니다. 7년 만에 만난 부자가 베이징에서 함께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김창숙은 1925년 8월부터 1926년 5월까지 10개월 동안 국내로 비밀리에 잠입해 유림단 독립자금 모금 운동에 나섰습니다. 김창숙이 베이징으로 돌아와 두 달쯤 지난 1926년 7월, 김환기는 김창숙으로부터 다시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밀명을 받고 귀국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즈음 국내에서는 '유림단 독립운동자금 모금 사건(제2차 유림단 사건)'이 발각되어 검거 선풍이 일고 있을 때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환기는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군자금 모집에 힘쓰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 김창숙의 초상화. 1927년 중국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을 때 모습을 둘째아들 김찬기가 그린 그림. |
ⓒ 심산 김창숙 평전 |
제2차 유림단 사건은 심산 김창숙에게 큰 시련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랜 망명 생활로 몸이 상한 김창숙은 치질과 만성 맹장염 등으로 중국 내 영국 조계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 중에 있었는데, 밀정의 밀고로 병원으로 들이닥친 일경에 피체되었습니다. 그때가 1927년 6월 10일이었습니다.
심산 김창숙은 곧바로 일본을 거처 부산으로 들어와 대구로 압송되었습니다. 김창숙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받던 중 맏아들 환기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김창숙은 1928년 7월에 예심이 끝나고 나서야 가족들과의 면회가 허락되었습니다. 김창숙의 아내는 찬기와 형기를 데리고 면회를 왔습니다. 막내아들 형기는 열 살이었지만, 이날 아버지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버지를 처음 만난 장면이 죄수복을 입은 모습이었다니, 너무 가혹한 첫 상봉의 순간이었습니다.
김창숙은 재판에서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일본 법률에 근거해 변론을 받을 수 없다 하여 변호사 선임도 거부한 채 1년을 넘게 재판을 받았고 징역 14년을 언도받습니다.
3번의 투옥 후 중경으로 밀파, 해방 후 죽어서 귀환한 김찬기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을 기폭제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도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이어졌는데, 1930년 1월 진주에서도 학생 만세 시위가 벌어지고 시내의 요소마다 격문이 나붙었습니다.
경찰이 주동자를 잡고 보니 김창숙의 차남 김찬기였죠. 김찬기는 당시 17살로 진주고등보통학교 1학년생이었습니다. 그즈음 김창숙은 대구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었습니다.
▲ 김찬기의 사진(왼쪽, 20대)과 손응교의 사진(오른쪽, 98세). |
ⓒ 경북여성정책개발원 |
김찬기는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1933년, 세 살 연하의 손응교와 결혼했습니다. 손응교는 김창숙의 울산 동지 손후익의 둘째 딸이었습니다. 며느리 손응교가 시아버지를 처음 맞이한 곳은 대전형무소였습니다. 남편과 함께 시아버지 면회를 간 것이 폐백을 올리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심산 김창숙이 감옥 문을 나온 것은 1934년 10월이 되어서였습니다. 김창숙은 고문과 고된 옥살이로 두 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에서 형 집행이 정지되어 출옥했습니다.
김창숙은 감옥 문을 나왔지만, 김찬기가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김찬기의 두 번째 투옥은 결혼 이듬해에 벌어졌습니다. 21살의 김찬기는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앞두고서 불온문서를 살포한 혐의로 1934년 11월 5일에 체포되는데, 다행히 사건은 크게 번지지 않고 한 달여 만인 12월 6일에 풀려났습니다. 김찬기는 1938년에 '왜관 사건'으로 세 번째 투옥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한 것은 3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김찬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43년에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밀파되었습니다. 막내아들 형기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19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뜬 장남 환기를 대신해 장남 역할을 해 왔던 차남 찬기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장남 역할을 막내 형기가 맡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김찬기는 중경으로 떠나면서 아내 손응교에게 늦어도 3년 안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는데, 3년이 채 되지 않아 일제가 패망해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찬기는 해방 후 귀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5년 10월 10일에 중경에서 병사했습니다. 김찬기의 유해는 화장한 후 나무로 짠 작은 유골함에 담겨 고향으로 봉환되었습니다. 남편이 살아 돌아올 거라 기대했던 손응교는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목이 잠겨 5~6개월 동안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죽을 때까지 민주·통일운동에 나선 김창숙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심산 김창숙은 모진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김창숙은 불의에 항거하며 철저한 선비 정신으로 일관했습니다.
▲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 캠퍼스(서울)에 세워져 있는 김창숙의 동상. 김창숙은 성균관을 부활시켜 1946년 9월 성균관대학 설립했고, 성균관장을 겸하는 초대 학장에 취임한 이래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했다. |
ⓒ 임재근 |
그런데도 김창숙은 보안법 개악 반대투쟁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경제활동 수단을 모두 상실당한 김창숙은 막내아들 형기가 자동차 운전을 하여 벌어온 돈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김창숙은 1962년 3월 1일에 가장 높은 등급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불과 두 달여 후인 5월 10일 84세의 일기로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막내아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떠난 형들을 대신해 그때까지 아버지 곁에 지킬 수 있었습니다. 청빈한 선비의 삶을 살았던 김창숙은 집 한 칸도 없이 여관을 전전하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대전현충원에 함께 묻힌 부부, 그리고 형제
손응교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남매를 키우며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며느리가 안쓰러웠던지 김창숙은 며느리에게 담배를 가르쳤습니다. 그때부터 손응교는 줄담배를 피우며 고된 삶을 달래는 애연가가 되었습니다.
1933년에 결혼한 김찬기, 손응교 부부는 김찬기가 주검으로 돌아온 1945년까지 10여 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 사이 김찬기는 두 번을 투옥당해 수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1943년에 중경으로 밀파되었다 죽어서 돌아왔으니, 실질적으로 부부가 함께 보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김찬기는 항일운동의 공훈을 인정받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2007년 10월 18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620번에 안장되었습니다. 손응교는 70여 년을 홀로 살다가 2016년 12월 30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620번에 안장되어 있는 애국지사 김찬기의 묘. 부인 손응교도 배위로 합장되어 있다. |
ⓒ 임재근 |
군자금 모금을 하다 체포되어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19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뜬 장남 김환기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2023년 3월 21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 100번에 안장되면서 김창숙의 장남과 차남, 두 아들은 가까운 자리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창숙은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낸 두 아들과 함께 자리하지 못하고 서울 강북구 수유동 산 127-4번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참고 자료]
김상웅, <심산 김창숙 평전>, 시대의창, 2006.
임경석, <독립운동 열전 2 - 잊힌 인물을 찾아서>, 푸른역사, 2022.
강윤정, 권순신, 송호상, 임삼조, 정일선,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경북여성의 삶 Ⅱ - 하고 싶은 말은 태산도 부족이라>, 경북여성정책개발원, 2014.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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