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삼쩜영] 미국에서 맞는 핼러윈... 이태원 1번 출구 앞에 헌화합니다
[김보민 기자]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1년 가까이 살아보니 미국인들은 연중 2회 집 안팎을 분주하게 꾸민다. 미국인들의 명절 또는 행사 날인 셈인데, 하나는 크리스마스이고 다른 하나는 핼러윈이다.
▲ 요즘은 어디를 가나 핼로윈을 위한 호박 장식을 만날 수 있다. |
ⓒ 김보민 |
즐거울 수 없는, 미국에서 만나는 첫 번째 핼러윈
핼러윈의 본고장 미국에서 첫 핼러윈을 맞이하는 아이들은 재미있는 행사에 참여할 생각으로 시월 초부터 들떠 있었다. 나에게 하루라도 빨리 호박을 사다가 집 앞문에 두고, 핼러윈을 연상케 하는 장식품을 사서 집 안도 꾸미자고 했다. 아이들의 친구 엄마들은 유령 복장을 하고 동네를 돌며 초콜릿이나 사탕을 받는 놀이(Trick or treat, '맛있는 걸 주지 않으면 장난칠 거야'라는 뜻)에 아이들을 초대했다.
아이들에게 정확한 설명은 하지 않고 집 안 꾸미기를 차일피일 미뤘다. 아이들을 초대한 친구 엄마에게 언제 어디서 핼러윈 놀이를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즐길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행동으로 옮기는 나였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 동네 농장에서 만날 수 있는 색색의 크고 작은 호박들 |
ⓒ 김보민 |
지난해 가을, 싱가포르 생활 5년을 정리하며 미국으로 이사 가기 직전 잠깐 한국에 머물렀다. 토요일 저녁 남편은 친구들과의 약속을 위해 외출을 했고, 두 아이를 재우고 혼자 소셜미디어를 드나들며 여유를 부리던 밤이었다. 당초 그날 저녁 일정은 동생네 가족과 오랜만에 이태원에 놀러 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약간은 괴기스럽지만 재미있는 분장과 복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했다. 그러다 일정이 어그러지며 일찍 잠자리에 든 토요일 밤이었다.
서울에 살 때 이태원은 나의 일상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동생과 이태원에서 2년가량 살면서 동네 골목 구석구석을 누볐다. 주말이 오면 느지막이 일어나 특색있는 커피숍에서 맛있는 커피 한잔을 하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고, 저녁이면 곳곳에서 모여드는 개성 넘치는 사람들 속에서 젊은 기운을 만끽하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해가 떠 있을 무렵의 이태원이 마치 분장하기 전 연극 배우의 모습이라면 해가 지고 네온사인에 불이 켜지고 가장 핫하다는 음악이 골목 구석구석에서 고막을 찢을 듯 터져 나올 때 이태원은 자신의 배역에 충실한 배우의 모습을 하고 있어 매력적인 곳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이태원에 나가려다 마음을 접었던 그날 밤, 가르릉 소리를 내며 잠든 아이들 옆에 누워 소셜미디어에 사람들이 올리는 글과 사진을 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이태원에서 벌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가 있다는 정부 공식 발표를 확인한 순간 친구를 만나러 나간 남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디서 친구를 만나고 있는지 모를 남편에게 자정 넘은 시간까지 전화를 했고, 새벽이 되어서 이태원이 아닌 곳에 있다는 연락을 보고 안심을 하며 잠에 들었다.
생각지도 않은 사망자 숫자를 뉴스를 통해 본 다음날부터 한국에 있는 내내 그 어떤 즐거운 순간도 나의 소셜미디어에 기록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았던 곳, 휴일이면 산책하며 다녔던 그 골목에서 일어난 참사 앞에서 나는 운이 좋아 사고를 겪지 않은 사람인가 생각했다. 참사 당일 친구를 만나러 나갔던 남편은 이태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친구를 만났기에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생각했다. 주말 일정이 꼬이지 않았더라면 나도 아이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이태원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하며 다녔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 모든 생각은 아주 쓸데가 없고, 부질없는 생각들이다.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좋아하는 이들과 추억을 쌓기 위해 특정 지역을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다. 주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 위험하지 않은 범위 안에서 마음 놓고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곳에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아니,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은 한 안전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안전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해 이태원에서 다시 한번 '안전'을 위협받았다. 노란색 리본 옆에 보라색 리본을 나란히 두는 지금의 마음은 너무나도 무겁다. 사무실에서 바다 한가운데 생각지도 않은 모습을 한 배의 일부가 텔레비전에 나온 모습을 곶감처럼 쪼그라드는 마음으로 지켜본 날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른다. 광화문에서 받아온 노란색 리본 고리와 팔찌는 여전히 내 서랍에 있고, 4월이면 자꾸만 이름이 희미해지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 아닌 기도를 읊조린다.
다시 지난해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2014년보다 세상은 더 나아진 듯 보이지만 우리는 늘 제자리에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너무나도 익숙하고 아무렇지 않아 별일 없을 거라 여긴 곳에서 소중한 삶을 잃은 이들과 소중한 이들을 잃은 이들을 다시 만난다. 그간 나의 기도는 별 소용도 없는 말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게 된다.
▲ 아이들이 동네 행사장에서 가져온 작은 호박과 국화로 집 입구를 장식했다. |
ⓒ 김보민 |
내가 살았던 이태원에 대해, 내가 경험한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 대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지난해 있었던 참사에 대해서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명해 준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언젠가 너희가 커서 지구 어느 곳에서 열리는 핼러윈 축제를 즐기고 싶다면, 안전에 대한 걱정 없이 갈 수 있어야 해. 그리고 그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안전해야 해."
미국에서 처음 맞이하는 핼로윈, 참사 이후 첫 핼로윈을 마주할 시간이다. 아이들의 소원대로 괴상한 복장을 한 아이들과 아이들의 친구들과 동네를 다니며 초콜릿을 받으러 다닐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이태원역 1번 출구에 헌화하면서 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고아와 탈북민도 징병? 제대로 된 징병제 논의가 필요하다
- 보수언론의 '뒷북치기' 윤 대통령 비판
- 1학년 조소과 수업, 누드모델의 입이 근질거릴 때
- [단독] '퀵플렉스 사망' 관련 없다는 쿠팡, 매일 아침 업무지시했다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자빠졌네
- 일본 대사관 앞 안중근 동상? 윤 정권 '홍범도 지우기'의 본심
- 가자지구 분쟁에 한국이 제공한 불씨... 현실은 이렇다
- 우리 군 수송기에 이스라엘 일본인 태운 이틀 후... 일본이 또
- 이동욱 이사 임명에 KBS 부사장도 "이해 안 간다"
- 바이든 18일 이스라엘 방문... 팔레스타인 수반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