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가을을 지나는 시인이 그린 다정의 세계
[안준철 기자]
손목
술집에 앉아 친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이 통해 손을 잡아가다가
눈앞의 손목이 마치 어디로 걸어 들어가는 길목 같아서
인간의 마음이 들고 나는 주택가 골목 같아서
늘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 하던
내 손목을 바라보고 있다
- 김영춘 시집 <다정한 것에 대하여>(애지시선, 2023)
김영춘 시인은 내가 은퇴 후 고향인 전주로 돌아와서 7년째 유일하게 만나는 남자다. 우리가 자주 접선하는 곳은 건지산 단풍나무 숲인데, 그의 다정함과 나의 밝음이 빚어내는 화음이 단풍나무 색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을 것이다.
▲ 시집 <다정한 것에 대하여> 표지 김영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다정한 것에 대하여> |
ⓒ 안준철 |
그가 두 번째 시집 이후 10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상재했다.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간격은 무려 20년이다. 그가 정양, 안도현, 박남준 등 선후배 시인들로부터 "시를 쓰지 않아도 시인"이라는 평을 듣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그 말이 함의하는 바가 아무리 긍정적이라도 시인이 시를 쓰지 못한 곡절까지 상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한 가지 일에 매달리면 다른 일은 손이 잘 안 가는" 자신의 성향에 대해서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손이 잘 안 가는 일은 시를 쓰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 그가 매달려야했던 한 가지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니, 그 이전에 이 말을 먼저 해야할 것 같다. 그는 무엇보다도 시를 쓰는 그 한 가지 일에 매달리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로 하여금 시를 쓰는 일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밀어낸 일의 실체에 대해서는 길게 쓰지 않겠다. 다만, 그가 20년 넘게 지역의 교육과 청소년들을 위해 애써왔다는 사실만 말해둔다.
김 시인은 "버릴 수 없으니 품고 가게 되었다. 버릴 수 없었으니 덤덤하게 별것 아닌 것처럼 덤덤하게 적어 갔으면 한다('시인의 말' 중에서)"라고 적고 있다. 그나저나 시인은 왜 자꾸만 남의 손목을 잡으려 하는 것일까? 물론 그의 다정함 때문이겠다. 그 다정함으로 인해 시인은 "사과를 따는 손가락의 힘이/사과를 눌러 멍들게 할 수 있다는 말"을 흘려듣지 못한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손을 잡았다/십 분쯤 잡았을까/이십 분쯤 잡았을까/잡은 손에 가만히 힘을 주어보기도 했다/이제 웬만하면 손을 놓아야할 것 같은데/원래 같이 있던 손처럼 편안해서/쉽게 놓지 못한다/굵고 거친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기운이 가득하다/농민운동으로 늙은 손이다/투쟁이 사랑에 이른 손이다/이렇게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손은/도대체 얼마만인지 알 수가 없다/차를 내릴 때까지 내내 놓지 못했다/송병주 의장의 거칠고 두꺼운 손이다. - 시 <놓기 어려운> 전문
중요한 것은 이렇듯 남을 손을 잡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이 자신의 손목으로 향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인용한 "늘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 하던/내 손목을 바라보고 있다"는 시구를 통해서 유추해볼 수 있다. 자신에 대한 다정함은 자신에 대한 연민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시인은 어느 날 "경마장 근처를 지나다가 늙어가는 말을" 본다. 마침 겨울이었다. 시인은 그 늙어가는 말에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벌판을 달리고 콧김을 내뿜은 시간을 뒤로 한 채/제 스스로의 마구간 안에 홀로" 서 있는. "천천히 몇 걸음씩 오가며 자신을 느끼고" 있는.
가까이 가서 몸을 기대고 싶었다
그제서야 나도 서 있는 짐승이었다
그제서야 우리가 살아온 날들이
싸락눈이 서걱이는 그런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제서야 바깥을 서성이던 발자국들이
나를 따라서 내 안으로 들어오는 듯 했다
- 시 <서성였네> 부분
내가 여름 내내 찾았던 전주 덕진연못에서 자전거로 오 분쯤 달려가면 오송지라는 작은 방죽이 나온다. 거기에도 연꽃이 핀다. 올해는 태풍 영향 때문인지 연꽃이 거의 피지 않았다. 김영춘 시인이 거기 다녀와서 쓴 시가 눈길을 끈다.
장마 끝나고 태풍 두어 개 지나간 뒤/건지산 오송지에 피어난 연꽃//느즈막에 피어 났으니/오늘처럼 앳된 얼굴로 늙어갈 것입니다//문득 가을바람이 불어와/사는 일 쓸쓸한 것을 우연히 알게 된다 하여도//햇빛은 온 세상에 고루 반짝이며 부서져/다시 살아나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저 어린 것이/동무도 없이 너른 물결 위에 남아/가을을 맞아들이며 홀로 피었는데//나는 고작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다른 말귀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 시 <여름 끝자리에 핀> 중에서
시집 해설에서 복효근 시인은 "이 다정하고 웅숭깊은 염원 앞에서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귀가 없다"고 적었다. 또한, "시인의 다정은 어느 정도 페이소스가 그 배후로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소한 일상의 어떤 사물에 관한 것일 지라도 곧 보편적인 인간사와 사회의 맥락으로 확장한다는 점이다"라고 강조한다.
김영춘 시인과 내가 사는 "전주 한옥마을에 가면/전동성당에 있고/경기전이 있"고 "심지어는 동학혁명기념관이 있('산책')"다. 그리고 동학혁명기념관 앞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늙어가면서/전봉준 김개남 이런 사람들의 눈빛을 지켜보고 있는데/무너지는 몸을 겨우 이기는 그 곁으로/열대여섯 살쯤 됐을까/싱그러운 어린 은행나무가 나란히 서('다정한 것에 대하여)"있다. 나도 한옥마을에 갈 때마다 여러 번 본 광경이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휙 둘러본 것이 다였다. 김영춘 시인은 달랐다.
"요즘 식으로 유전자를 따라가 봤더니/늙은 어머니가 틀림없다고 한다/아비도 없이 어찌 아이만 남았을까/우금치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돌아오지 못한 것일까"라고 궁금증을 품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 나라의 슬픔으로는/아비가 돌아오지 않는 동안에/어린 것이 어미 곁에 홀로 서 있는 정도는 되어야/인간사의 다정이 제대로 피어나는 것인가/그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인가"라고 비감과 함께 다정함에 대한 심사를 드러낸다.
김영춘 시인은 전교조 해직교사다. 글 말미에 이 이야기를 굳이 하는 것은 아직 소개하고 싶은 시가 남아 있어서다. 이 시는 시집에서 드물게 행갈이 없이 산문투로 되어 있다. 읽어보니 이해가 된다. 시의 형식으로는 담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가권력이 선생 1500여 명을 한꺼번에 쫓아낸 전대미문의 일이라서가 아니다.
"약력란에 비어 있는 시간에 (전교조 해직교사라고 쓸까 말까를 생각하다가) 끝내 쓰지 못하는 시대를 쑥스럽게 살아가면서 이런 기억은 이유도 없이 왜 떠오르나. 아마도 노란봉투 안에 담긴 보충수업비 앞에서 떨리고 말았던 내 어깨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내에게 잠시 기대고 말았던 내 어깨 때문은 아니었을까." - 시 <떨리고 말았던 어깨 때문에> 중에서
1988년 <실천문학> 복간호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영춘 시인은 "요즘은 시만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나날이라 이번 세 번째 시집과 네 번째 시집의 간격은 조금 좁혀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내다본다"고 말한다. 반가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저는 저에 대한 애착이 아직도 과해서 저의 시를 안쓰러워합니다. 전에는 시적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은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사인 시인은 추천사(표4)에서 "그는 사람 손을 꼬옥 잡기를 좋아한다. 숨은 다정이 속 깊이 있고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에게 몇 번 손을 잡힌 적이 있다. 다음에 만나면 나도 "마치 어디로 걸어 들어가는 길목 같은" 그의 손목을 슬그머니 잡아보고 싶다. 김영춘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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