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고장 난 금고
‘무게가 웬만해야 움직이지.’ 버리기도 힘든 것이 황금 덩어리나 되는 양 앉아 있다.
무엇이거나 고장 난 것은 모두 부담스러운 짐이 되는가 보다. 여전히 안방 아랫목 안온한 자리를 차지하고 천연덕스럽게 폼 잡고 앉아 있다. 이 금고가 우리 집에 처음 들어오던 날에는 위풍당당하게 비서를 둘씩이나 대동하고 왔다. 우리 집에서도 아무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조심스럽게 모셨다.
지금 그 금고가 낡았거나 겉모양이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기능이 고장 났다. 아직 폐품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미안하다. 금고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리 내 기능이 부실해졌기로서니 처음엔 온갖 귀중품을 내게 다 안기더니 그렇게 몰인정하게 안면을 싹 바꾸느냐?’고.
‘그나저나 저 쇳덩어리를 어떻게 치울까’ 생각하는데 금고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당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당신의 지킴이였다. 당신의 소중한 것은 다 내 품 안에 있었다. 당신이 한 달씩 집을 비울 때도 당신의 재산 목록은 다 내게 안겨 있어 안전했다. 내가 버림받는 건 숙명이겠지만 당신에게 한마디 남기고 싶다. 나도 고침 받아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 것이다. 당신의 지킴이가 되어 세상에 하찮은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분명하게 내 귓전에 또박또박 토로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무용지물이 돼버린 금고에서 끄집어낸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뒤척이는 서류 중에는 푸성귀도, 가꿔먹을 수 없는 불모지 돌산 땅뙈기라고 핀잔받던 옛날 서류도 있었다. 거기 속기로 그려진 기적의 한 줄이 현실화될 줄 어찌 알았으랴!
앞길이 막막했을 때, 금고 속에서 문서가 튀어나왔다. 강산이 서너 번이나 지난 옛날얘기다. 아이들 학자금이 모자라 고심하며 가슴 조이던 어느 날, 뜻밖에도 구청에서 날아든 공문을 받고 건축과에 찾아갔다. 서류를 확인하던 남편이 갑자기 구청 앞마당에서 무릎을 꿇자고 하였다. 거액의 현금, 세금도 없이 찾아가라는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부지런히 살아왔는데 마이너스 통장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던 날들, 아무리 앞뒤를 재봐도 수수께끼처럼 풀리지 않는 그 날의 일은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이었다. 늘 모자라고 힘들고 어려운 날들이었지만, 우리 가족을 더 든든히 세워준 은혜였음을 고백하는 시간이다.
자녀들은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 따라 지구촌 곳곳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잘 펼쳐나가고 있다. 잠시 지나간 시간을 유추하며 아이들의 성장기를 떠올려 자문자답하며 아이들 이름을 불러본다.“든든한 장남 선민아! 외유내강의 표상인 딸 선주야! 심성이 아름다운 막내 선웅아! 사랑한다. 너희들과 함께 지낸 날들이 참으로 행복했다.” 만 가지가 부족하고 볼품없는 내게 내 힘과 재능, 그 어떤 숨겨진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내 힘과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 나는 그저 고개를 들 수 없는 사랑에 빚진 자다.
매 순간순간이 기적이었음을 절절하게 고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가정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조목조목 이름을 붙이고 제목을 붙인다면 아마도 근사한 한 편의 드라마 대본이 될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다. “Silence”라고 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으로도 당연하지 않은 오직 은혜, 은혜였음을 고백한다. 고장 난 금고 앞에서 두 손 번쩍 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 드린다.
우리 부부는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아이들 셋을 국제인으로 키우겠다는 야무진 꿈은 해가 바뀔수록 꺾이지 않고 아이들의 신발 크기와 신장의 크기처럼 염치없이 자라났다.
“부족함은 인생 최대의 선물”이라는 유대인의 탈무드 명언을 인용하면서 나를 설득했다. 자신이 허영심으로 무모한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년의 나이에 도저히 불가능한 미래의 비전을 가슴에 품은 황당한 사람이었다고 내게 얘기하곤 했다.
나의 스승 나의 동반자, 남편의 고귀한 자취가 고장 난 금고 속에 절절히 고여 있다. 여기 시집 장가 떠난 아이들의 통지표와 표창장이 한 묶음이나 된다. 버릴 수 없는 것, 이것들을 어찌 버리겠는가. 금은보화 그 무엇이 이런 것들을 뛰어넘어 내게 신선한 충격을 자아낼 수 있을까. 궁상맞거나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보기에 퇴색하고 너덜거리는 통지표와 상장과 졸업증서 속에 나의 보배 당신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어 있다.
“나의 왕 엄마”라고 불러주던 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엄마가 잔소리 많이 해서 미안하다”고 했을 때, “엄마가 하는 말은 잔소리가 아녜요, 좋은 소리예요”라고 하던 막내아들의 기막힌 위트, 내 몸이 허약해 때때로 외롭고 힘들어 눈 붉힐 때면 내 등 뒤에서 “엄마 내가 있잖아요!”하던 든든한 장남, 엄마 눈 속으로 걸어 들어올 듯이 눈망울 맞추던 사랑스러운 딸, 이젠 내 품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아이들, 때론 마음의 거리가 몸의 거리만큼 먼 것 같은 피붙이들, 이런저런 흔적을 버릴 수 없어 짐 보따리를 꾸려서 지고 다닌다.
문득문득 그리움을 붙잡아보고 싶을 때면 인생 참고서 같은 흔적을 펼쳐놓고 두 손을 모은다. 이제는 애착을 넘어 보물만큼 소중하다. 나를 버릴 때까지 그때까지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소중한 남편의 눈물겨운 학창 시절의 마디마디 아름다운 족적이 차디찬 쇳덩어리 속에 쌓여 있다. 나의 멘토요 스승이 되는 사랑하는 나의 분신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어두움을 걷어내는 빛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내가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밑거름이 되어 주는 나의 분신들이다.
남편은 양친을 다 여의고 인생에 가장 소중한 소년기를 고독하게 지냈다. 데이트 시절 식당에 마주 앉아 식사할 때였다. 몹시 서툰 젓가락질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한 적이 있었다. 그가 무안할까 봐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건져 먹을 것도 없는데 젓가락을 들고 점잔 떠는 건 가식이 아닐까 하는 말에, 망치로 한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 비록 가난하고 힘들었으나 나는 딸 하나를 얻기 위해 정화수에 목을 맨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다섯 명이나 되는 오빠들 사이에서 온 가족의 소원을 이루어준 딸이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누구나 기죽어 사는 것이 애처로워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소중했던 소년기 10여 년의 외로운 시절의 상황이 뼈저리게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랑하는 이의 학창 시절의 통지표와 상장, 대학 졸업장과 측량사와 토목기술사증을 간직하고 있다. 증명사진과 그의 손때 묻은 지갑과 증명서도 함께 간직하고 있다. 아들딸의 초등학교 통지표들을 다시 펼쳐 읽어본다. 이것들을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나라의 큰 제목이 될 아들입니다.’ ‘심성이 아름다운 학생입니다.’ ‘근면하고 솔선수범하며 매사에 모범입니다.’ 고장 난 금고 속에 금괴보다 소중한 천금 같은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남편의 고귀한 자취. 이제 지구촌 넓은 세상에 날개 달고 날아다니는 천사 같은 자녀들, 영원히 살아 있을 빛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그림자로 빛의 소명을 감당키 위해 매시간 지경을 넓혀 살아가고 있다. 분명한 하나님의 메신저들이 되길 갈망한다. 오늘은 고장 난 금고, 차디찬 쇳덩어리에서 온화하고 따뜻한 온기가 내 몸을 감싸 안고 있다. 아! 금괴보다 귀한 고장 난 금고여!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 : 12)
<포도나무>
내 생애
처음 산 집
문화촌 산동네
축대아래 외로운 집
솟아오른 아침 해가
차마 떠나지 못하고
가슴조이며 저녁까지
걸려있는 집
포도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테라스까지 뻗어 오른
포도나무 가지,
포도 꽃이 만개하니
좁은 마당에 부요가 가득하다
향기까지 무르익으려면
까마득한데
동그란 포도 알 숫자만큼 행복하다
행복은 초록빛이다
새벽 별빛이다
포도 향으로 퍼지는 희망
눈 밑으로 젖어드는 애절한 그리움
송이송이 엉긴 정
서로 볼 비비며 익어가는
끈끈한 가족애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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