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 '가위바위보' 게임도 계산된 홍상수 신작의 묘미

장혜령 2023. 10. 1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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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우리의 하루>

[장혜령 기자]

 영화 <우리의 하루> 스틸컷
ⓒ (주)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인생은 짧은 거야."

70대 홍의주 시인(기주봉)의 입을 빌려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전하는 홍상수 감독의 전언 같았다고나 할까. 제목 속 우리는 'Our'이면서 '고양이 이름'과 같은 중의적인 것처럼. 매콤한 라면, 술과 담배를 즐기며 한껏 쾌락을 맛보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긍정 요소가 아닐지 생각해 보았다.

건강을 생각해서, 미래를 위해서,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유혹을 참는다고 크게 달라지게 없는 게 삶이라면.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게 정답에 가까운 대답이 되리라고 믿는다. 오랜만에 고양이 우리를 보고 간식을 무한히 주던 상원(김민희)의 따뜻한 챙김과 길티 플레저의 쾌감을 느껴보길 안내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이 모이면 그게 인생
  
 영화 <우리의 하루> 스틸컷
ⓒ (주)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시인은 의사가 건강이 좋지 못해 술과 담배를 끊을 것을 요구했지만 자신의 다큐를 만들겠다는 젊은 여성(김승윤)과 시에 대해 질문을 하러 온 젊은 남성(하성국)을 만나자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다. 두 사람 다 시인을 동경하고 있다. 여성은 시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고 하고 남성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철학적인 답을 구하려 한다. 그 중심에 '시'가 있다.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세상에 시란 무엇이며, 시인은 무엇인지, 시를 계속 좋아해도 될지 묻는다.

시인은 좀처럼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 인생이란 하나의 시이며, 짧다면 짧은 게 인생이기 때문에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통속적인 조언만 해줄 뿐이다. 인생이니 예술이니 다 허상일 뿐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씁쓸한 말만 맴돈다. 하... 인생을 논하려니 술과 담배가 절실해지는 거다.

한편, 40대 배우로 일했던 여성은 잠시 선배 정수(송선민)의 집에 머물고 있다. 오후가 되자 배우가 되고 싶다는 젊은 여성(박미소)이 찾아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젊은 여성은 이것저것 선물을 들고 와 여성의 '연기' 노하우를 듣고 싶은 눈치지만 딱히 해줄 말이 없다. 그러는 사이 정수가 키우던 고양이(우리)가 없어지는 소동이 벌어지고 특별할 것 없었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 간다.

시인과 배우 두 사람은 묘하게 닮았다. 둘은 예술 종사자이며 전에 알고 있었던 관계로 보이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둘 다 라면을 먹는 장면에서 고추장을 풀어 맵게 먹는 식습관 때문이다. 시인은 고양이를 키웠지만 늙어 죽었다고 했고, 배우는 선배 집의 고양이가 강아지처럼 살갑게 다가와 기분이 좋다고 한다.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시인과 배우의 하루가 묘한 대칭을 이루면서 다른 듯 어딘가 비슷한 하루를 천천히 탐구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알고 보면 철저히 계산된 영화
  
 영화 <우리의 하루> 스틸컷
ⓒ (주)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우리의 하루>는 홍상수 감독의 30번째 장편 영화다.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 폐막작으로 상영된 후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되어 29번째 영화 <물 안에서>와 상영되어 관객과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 GV 중 단연 가위바위보 게임이 화제로 떠올랐다.

<우리의 하루> 속 가위바위보 게임은 우연에 기댄 장면이 아니다. 세 배우가 즉흥연기를 한 것 같아도 모두 대본에 나와 있는 치밀한 설계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술을 마셔야 하는 악랄하고 단순한 게임을 음주 촬영으로 마쳤다고 전해진다.

과거 홍상수 감독이 김민희라는 뮤즈를 만나기 이전 정유미가 단골 뮤즈로 활약했다. 정유미는 한 인터뷰를 통해 '대본 없이 그날에 맞춰 영화를 찍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소주잔 위치 하나까지도 계산된 철저한 대본이었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완벽한 계산 안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균형이란 소리다.

매번 비슷한 주제와 배우를 꾸려 그저 일상을 담아낸 듯 보여도, 보고 나면 계속 생각나는 은근하고 은은한 통찰이 홍상수란 브랜드의 전매특허임을 이번에도 증명한다. 전작 <물 안에서>를 아웃포커싱으로 완성한 이유가 '선명한 이미지의 실증'이란 말을 듣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딱히 무엇이 좋아서라기보다 좋은 걸 하다 보면 좋아지는 게 잘 보낸 하루임을 떠올려봤다.

하루를 잘 보냈다는 의미는 각자 다를 것이다. 따뜻한 이불 속에서 5분 더 꼼지락거리는 여유, 시간 맞춰 잘 도착했을 때의 안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아프지 않고 잠자리에 누워 보내는 안도감이 모여 하루를 만들어간다. 꼭 무엇을 성취하고 조금 더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과 불안까지도 받아들여 탈탈 털어 내면 내일을 시작할 작은 힘이 된다. 의미 없는 하루를 보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순간에 충실했던 시간만큼은 언젠가 삶을 빛나게 만들어 줄 조각으로 활약하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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