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들과 며느리 잃은 어머니의 삶은 어땠을까
[오문수 기자]
▲ 여순사건 당시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힌 형제묘 앞에선 박의철씨. 이곳은 여순사건 당시 부역혐의자로 지목된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총살당한 후 불태워져 묻힌 곳이다. 박의철씨의 셋째 작은 아버지는 형제묘가 보이는 애기섬에서 학살당해 수장됐다. |
ⓒ 오문수 |
10월 19일은 여순사건 75주기 날이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반대해 촉발됐다. 당시 희생자만 1만여 명이 넘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진압군이 들어오기 전 14연대 군인들은 여수를 떠났고 일주일 뒤인 10월 27일, 진압군은 여수서초등학교에 본부를 설치한 다음 시민들에게 확성기로 여수동초등학교, 진남관, 여수종산초등학교 등 다섯 군데에 모두 모이라고 방송했다.
"나오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된다"는 말을 듣고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낀 시민들은 모이라는 장소에 나왔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채 끌려왔던 사람들은 곧 '심사'라는 것을 받게 됐다.
▲ 여수 오동도의 여순사건 기념관에 있는 ‘손가락총’ 조형물. 손가락총은 당시 민간인 학살의 상징물이 됐다. |
ⓒ 이돈삼 |
125명 학살돼 함께 묻힌 형제묘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며 붙여진 이름
여수시내에서 검은 모래로 유명한 만성리 해수욕장 가는 길에는 '형제묘'가 있다. 일반인 묘보다 열 배쯤 큰 묘지 앞에는 형제묘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만성리 학살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이곳 형제묘는 학살 후 시신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며 형제묘라 이름 붙인 곳이다. 마치 제주의 '백조일손지묘'를 연상케 한다.
종산초등학교에 수용됐던 부역혐의자들 중 125명이 1949년 1월 13일 이 자리에서 총살되고 불태워졌다.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학살 현장을 직접 지켜봤는데, 5명씩 총살한 뒤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125명이라는 이야기를 증언한 바 있다.
처형은 헌병들이 주도했으며, 장작더미에 기름을 부어 태웠고 처형된 가족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초를 세우고 태워진 시신위로 큰 바위를 굴려서 덮었다. 시신은 3일간이나 붙에 탔으며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됐다고 한다.
드러내놓고 부모 형제의 억울한 죽음과 고통을 말할 수가 없고 연좌제로 주요 공직에 나갈 수 없어 속앓이했던 유족들에게 한줄기 밝은 빛줄기가 비친 것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2018년 처음으로 정부 주관 합동 추념식을 치렀고 2021년 국회에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법에 따라 2022년 74년 만에 '여순사건' 피해자 유족 45명이 공식 인정됐다.
박의철 "큰집 누나들은 '여수'의 '여'자만 들어가도 알러지 반응을..."
형제묘에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묻혀 매년 벌초를 한다는 박의철(78)씨를 만나 아버지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봤다.
여수시내에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박의철씨의 아버지 박소록(1913.1.6.생)씨는 부역자로 간주돼 형님인 박채영씨와 함께 만성리에서 학살당해 매장됐다. 형님인 박채영씨가 여순사건 당시 '여수인민일보' 편집인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 여수지역독립헌창회 회장이자 (전)여수시장이었던 김충석씨 일행이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 추가자료(박채영)' 모습. 자료에 의하면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러 고문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워있던 박채영씨를 여순사건 주역인 반란군이 일방적으로 지명해 여수인민일보 편집장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채영씨 부인과 3형제는 이 혐의로 희생됐다. |
ⓒ 오문수 |
"독립유공자 포상신청 추가자료(박채영 1909.9.7.- 1949.1.13.)
1929년 8월 제1차 여수독서회 가입 이후 여수의 항일노동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여수수산학교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는 등 여수지역의 투철한 독립운동가였음.
1934.1 일경에 피체되어 1936.7.2. 출옥. 고문후유증으로 요양, 늑막염,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 퇴원을 반복하는 중환자인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하였음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아무것 도 할 수없는 상태에서 1948.10.20. 새벽 여순사건의 주역들인 반란군(14연대)의 짚차에 실려 갔음(가족들의 증언)
여수 항일운동사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반란군에게 끌려간 후 그들의 각본에 따라 인민위 원회 의장단에 구두호천으로 선출되었고 1948.10.24. 여수인민일보 편집인(10.21자 소급발 행. 단 1회 발행, 여수문화92면)이란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여수에서 그들의 세상은 4 일이었으며 그들이 하는 대로 있었을 것이며 퇴각할 때는 짐이 될까봐 버리고 갔음으로 진압군에게 바로 체포 됨"
부역자로 지목된 두 형제는 형제묘에 묻혔고, 셋째인 박채현도 애기섬에 끌려가 학살당해 수장당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채영씨의 배우자 김종덕씨도 전주형무소에 갇혔다가 학살당했다. 한숨을 쉬던 박의철씨가 여순사건 직후 살아온 이야기를 해줬다.
"당시 나는 3살이었으니까 뭘 몰랐죠. 피난갈 때 배 타고 간 것만 기억이 나요. 아버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누나와 나를 데리고 외가인 안도 서고지 마을로 가서 삵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어요. 멸치잡이 하는 외가집 일을 돕던 어머니는 섬에 있으면 안 된다며 여안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를 여수 서초등학교로 전학시켰어요.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올해초 그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여수·순천 10.19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에서 유족결정 통지서를 받았기 때문이다.
"바라는 건 오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죠"라고 말하는 박의철씨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항간에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얘기가 있다. 박의철씨의 할머니 이두엽씨는 여순사건으로 세 아들과 큰 며느리를 잃었다. 가족을 넷이나 잃은 이두엽씨의 마음은 어땠을까. 한많은 세월을 살았을 그 분의 영면을 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가자지구 분쟁에 한국이 제공한 불씨... 현실은 이렇다
- "더이상 잃을 게 없다"... 이화영 측, 재판부 기피 신청 움직임
- [단독] '퀵플렉스 사망' 관련 없다는 쿠팡, 매일 아침 업무지시했다
- 1학년 조소과 수업, 누드모델의 입이 근질거릴 때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자빠졌네
- 보수언론의 '뒷북치기' 윤 대통령 비판
- 62세 재취업자가 희망연봉 '1억 3천' 썼다가 벌어진 일
- 광고 10억, 모금 5억? 배보다 배꼽 큰 '제주 고향사랑기부제'
- 의대정원 확대 속도조절? 국힘 "1000명 이상 확충, 사실 아냐"
- 영주댐의 심각한 녹조, 유명 관광지로 그대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