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익이 떠난 지 20년, 세상은 여전히 가혹하다
[박진현 기자]
▲ 2003년 10월 17일 낮 12시 고 김주익 한진중 지회장의 유서가 낭독되자 한진중 노동자들이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다. |
ⓒ 윤성효 |
고개를 내밀어 운전실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철제계단과 난간에 매여진 5mm 로프,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를 어쩌나, 깨진 창문으로 몸을 숙여 잠근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매어놓은 로프들을 끊어내었다. 붐대로 올라가는 철제계단과 난간에 목을 걸고 늘어져 있는 김주익 지회장.
마지막까지 지회장을 지키고 노동조합을 지키고 생존권을 부여잡기 위해서 그렇게 강건하게 투쟁해왔던 조합원들 어깨가 들먹이며 여기저기 오열이 터진다. 그래도 크레인 위에 올라간 간부들은 눈물을 감추고 마음을 다잡는다. 현장보존과 고인의 유서, 지회장 외 다른 사람의 침입 흔적을 찾지만, 김주익 지회장 생활 모습 이외는 아무 흔적이 없다. 경찰이 도착하고, 기자가 도착하자 그제야 지회장의 기나긴 고통을 잠시 줄여줄 수 있었다. 철판 위에 따뜻한 담요를 깔고 김주익 동지를 조심스레 뉘었다. 통신과 전화, 언론을 통해 김주익 지회장의 자결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비상 연락망과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한 조합원들이 부산은 물론, 울산과 마산에서도 달려왔다. 그동안 파업 집회, 농성장에 전혀 오지 않았던 조합원들도 모였다.
2023년 10월 17일 고 김주익 지회장이 묻힌 솥발산 묘역에 당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부 집행부들이 고인의 2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다. 고 김주익 지회장이 살아 있었다면 올해 정년퇴직을 한다. 1963년생인 김주익 지회장을 죽음으로 내몬 20년 전 한진중공업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고 김주익 지회장의 대형 영정을 필두로 집회 참가자들이 행진을 하고있다 |
ⓒ 정민규 |
한진중공업은 2002년 239억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조남호 회장과 그 일가들은 주식배당금으로 79억 원을 챙겼다. 조남호 회장 일가가 3년 동안 챙겨간 주식배당금은 240억 원이다. 조남호 회장과 그 일가는 2002년 79억 원을 챙기고 노동자에게는 임금 동결을 강요했다. 그것도 모자라 650명 노동자를 잘랐다. 한진중공업 사측은 불법해고와 임금동결을 반대하는 노조 간부 20명에게 7억4천만 원 손배가압류를 자행했다. 노조 간부 20명은 임금의 50%를 가압류당해 한 달에 40만 원, 50만 원의 임금으로 생활했다. 심지어 고 김주익 지회장 등 노조 간부 7명은 자신이 사는 집까지 가압류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 대우조선해양 유최안 사내하청비정규노동자가 농성을 하고 있다 |
ⓒ 금속노조 선전홍보실 |
20년이 지났다. 현실은 바뀌었을까. 470억, 대우조선해양이 하청노동조합 간부 5명에게 청구한 손해배상액 금액이다. 한 명당 94억 원, 월 300만 원씩 벌어서 꼬박 갚아도 261년이 걸리는 돈이다. 현실감이 들지 않는 금액, 회사가 이 돈을 받는 것이 목적일까. 노조 와해가 진짜 목적이 아닐까. 회사가 압류한 것은 노동자의 삶이다.
사측의 손배가압류 역사는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한 한진은 인수 직후인 지난 1991년 노조 활동을 문제 삼아 노조 간부 12명에게 7200여만 원 손배가압류를 청구한 바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8월 기자회견을 열어 1990년 이래 지난 30여 년간 누적 3160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이 노동자에게 청구됐다고 밝혔다. 사용자에 의해 무분별하게 청구되는 손해배상 청구는 '쟁의로 인한 회사의 손실을 보전한다'라는 명분과 달리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절박하고 정당한 요구를 가로막고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훼손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원청의 사용자 책임과 기업의 손해배상 금지를 명확히 하도록 노동조합법 2, 3조를 개정하고, 노동자의 단체행동에 대한 기업의 과도한 손배소와 가압류를 제한할 노란봉투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했다.
2014년 법원이 쌍용차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47억 원의 손해배상액 청구 판결을 한 후 한 시민이 '노란색 봉투'에 4만7천 원을 넣어 성금을 전달했다. 이후 시민들의 '노란봉투 캠페인'으로 이어졌고 15억에 가까운 돈을 모금했다. 과거 월급봉투가 노란색이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손배가압류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예전처럼 월급을 받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되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 '노란봉투법'이다.
이 캠페인의 이름에 착안해 정의당은 작년 9월 일명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합법 2·3조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56명의 정의당과 민주당 의원이 함께했다. 법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폭력, 파괴행위로 인한 손해를 제외하고는 노동조합이 노동쟁의를 하면서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책임 청구를 제한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사용자의 범위를 기존의 직접적인 고용 주체에서 '근로계약의 형식과 상관없이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대해 실질적 지배력 또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로 확대하여 협력업체 노동자들이 원청과 직접 교섭하거나, 플랫폼 노동자들이 플랫폼 회사와 교섭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노란봉투법은 아직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여야 교섭단체 대표는 지난 10월 6일 본회의에서 "여야 간 논의를 거쳐 합리적 대안을 마련하여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하고, 노조법 개정안 상정을 보류했다.
▲ 민주노총이 2022년 8월 노란봉투법 입법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열었다. |
ⓒ 민주노총 노동과세계 |
대우조선해양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사용자의 손해배상 청구는 노동자들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규모로, 실제 손실액을 보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투쟁에 나섰던 노동자의 삶과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사용자들은 손해배상 청구를 사측 불법행위에 대한 소송 포기, 노동조합 탈퇴 종용 등 노동조합 탄압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사용자의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는 쌍용자동차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와 손배가압류로 인해 20여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사용자의 손배가압류는 업종과 사유를 가라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직장인 10명 중 7명은 사용자의 범위를 넓혀 하청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 사업주에도 사용자 책임을 부과하는 노조법 2조 개정에 동의한다는 설문 결과가 나왔다. 직장갑질 119가 지난달 2일부터 10일까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전국 만 19살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9월 17일 공개한 결과, 응답자 71.9%는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강화하자는 취지의 노조법 2조 개정안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노조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에 대해선 '해선 안 된다'는 응답(44.4%)이 '행사해야 한다'는 답변(20.6%)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노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하면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바 있다.
대법원은 올해 6월 15일 현대차가 금속노조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소속 노동자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개별 조합원에 대한 책임 제한의 정도는 노조에서의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 참여 경위 및 정도, 손해 발생에 대한 기여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노동자 개인에게 노조와 함께 배상액 전액을 책임지게 하는 건 형평의 원칙에도 어긋나고 헌법에 보장된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취지다. 이는 노란봉투법의 "법원은 손배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 귀책 사유의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해야 한다"는 조항과 거의 같은 맥락이다. 대법원이 사측의 과도한 손해배상을 제한하자는 입법취지를 인정한 것이다.
▲ 고 김주익 지회장 |
ⓒ 한국해양대학교 학보사 |
고 김주익 지회장은 85호 크레인 위에서 2003년 9월 9일과 10월 4일 두 번에 걸쳐 유서를 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은 10월 17일이다. 그 간격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노동자는 살기 위해서 투쟁한다. 손배가압류는 살기 위해서 투쟁하는 노동자에게 죽거나 노예로 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고 김주익 지회장의 유서에 이렇게 적혀있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 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무엇하나 해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어서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아이들에게 휠리스(바퀴 달린 신발)인지 뭔지를 집에 가면 사주겠다고 크레인에 올라온 지 며칠 안 되어서 약속했는데 그 약속조차도 지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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