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해방론 선구자, 가정보다 국가민족
[김삼웅 기자]
▲ 묵암 이종일 선생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19세기에서 20세기 초 반봉건·민족해방 운동에 나선 이들은 이중삼중의 굴레에서 싸워야 했다. 낡은 봉건주의 폐습과 이에 종속된 권력 그리고 국권을 침탈한 외세와의 싸움이었다. 그러다 보면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해외 망명자들은 대부분 단신으로 떠나고, 국내에서 항일투쟁 역시 '가사불고(家事不顧)'의 처지였다.
이종일은 시종 국내파에 속한 독립운동가인데, 파란곡절의 생애 중 가족(가정사)에 관한 기록은 찾기 어렵다. 1898년부터 1925년 작고할 때까지 연속적으로 주요 사실을 기록한 『묵암 비망록』에도 한 대목일 뿐이다. 1899년 4월 19일 자이다.
실학 및 개화에 관한 서적을 사내에서 읽다. 아내와 언쟁을 했는데 가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만이 바로 나의 원하는 바이요 사사로운 정 따위는 돌볼 수가 없다. 남편의 위대한 사업을 이해할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아내에게 호령했더니 이해하는 아내가 되었다.
『제국신문』을 발행하던 시기였다. 일기 한 대목으로 그의 여성관을 재단한다는 것을 무리에 속한다. 그럼에도 여성들과 밑바닥 서민 대중을 계몽하고자 순한글 신문을 펴낸 사람의 기록이어서 다소 의외스럽다.
참고로 그의 여성관련 주요 논설을 살펴보았다.
▲ 이종일 선생이 창간한 <제국신문>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대부분 『제국신문』에 쓴 논설이고, 맨 마지막 글은 『천도교회월보』 4권 31호에 실렸다. 그는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 여권신장을 주창하고 남녀동권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한계도 없지 않았다. 남의 첩이 된 여자와 기생 등을 제외한 것이다.
그의 여성해방론에서 대상이 된 것은 전체 여성이 아니었다. 즉 그는 남의 첩이 된 여자와 천기는 동등권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제한적 여성 해방론을 주장한 것이다. 그 까닭은 첩과 천기들이 하늘이 내린 천부적 동등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죄책감을 일깨워 주어야 하며, 만약 이들이 여학교나 부인회에 참여했을 때 사부가(士夫家)의 부인들이 참여를 거부하거나 그들의 그릇된 행동거지를 배울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첩과 천기를 해방대상에서 영원히 제외한 것은 아니었다. 즉 이들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행실을 고치면 즉시 동등권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주석 77)
이종일이 언제 누구와 결혼을 하고 자식은 몇 명을 두었는지 등 가족사는 기록을 찾기 어렵다. 김용호는 『옥파 이종일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옥파는 평생동안 다섯 번이나 상처를 겪은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그에게는 아득한 가정이나 안방의 윗목보다는 뜨거운 정열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소나기처럼 퍼붓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가정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이끌기 위해 신경 쓰기보다는 대장부답게 국가사회를 위하여 큰 일을 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겼다.
언제인가 집에까지 찾아온 위창 오세창과 단둘이 술상을 앞에 놓고 대작을 하며 담소할 때의 일이다. "형님! 아무리 밖에서 대지(大志)를 펴기 위해 큰 일을 한다 해도 수신제가치국 (修身齊家治國)이라는데 집안 일에부터 성실하는 것이 순서지요…."
위창은 은근히 옥파의 집안을 돌보지 않는 일을 꼬집자,
"나는 대장부야! 큰 일을 해야 하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그 일을 성취해 내야 할 일이지 자질구레한 집안일에 머리를 쓸 수는 없는 일일세."
옥파에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바쳐야 한다는 의지밖에는 없었다. (주석 78)
주석
77> 박걸순, 앞의 책, 56쪽.
78> 김용호, 앞의 책, 25~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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