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지는 재판, 대장동·이태원 줄보석 풀려났다…피고인만 쾌재 [보석 딜레마 上]
“첫째, 구치소에서 피고인이 공판준비를 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둘째, 변호인이 피고인 한 명만 맡는 게 아닌데 구치소에서는 접견 시간도, 전자문서 반입도 제한적입니다. 셋째, 피고인의 배우자가 항암치료 중인데 보호자가 피고인 뿐입니다.”
지난 10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 김정곤·김미경·허정무) 심리로 열린 윤관석 무소속 의원의 보석심문 기일에서 변호인은 세 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들었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측근인 윤 의원은 2021년 당 대표 경선 당시 민주당 의원들에게 돈봉투를 돌린 혐의(정당법 위반)로 구속기소된 상태다. 윤 의원은 구속영장이 발부(지난 8월 4일)된 지 한 달 남짓 지난 9월 15일 보석을 청구하면서 재판부에 ‘어떤 보석 조건도 받아들이겠다’는 취지를 밝혔고 이날 본 재판에선 혐의 일부를 시인했다. 윤 의원은 심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김용, 정진상 등 주요사건 피의자 줄보석
최근 법원이 대장동 개발비리, 이태원 참사 등 굵직한 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한 보석을 잇따라 허용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정진상 전 민주당 정무조정실장(4월 7일 보석),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5월 4일), 박희영 용산구청장(6월 7일),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7월 6일) 등이 대표적 사례다. 지난 10일엔 ‘백현동 로비스트’ 김인섭 전 한국하우징기술 대표도 보석으로 풀려났다.
보석(保釋)은 구속 상태의 피고인에게 보증금을 받고 일정한 조건을 걸어 풀어주는 제도다. 불구속 수사·재판의 원칙에 따른 사후적 구제수단이다. 주요 사건의 피고인들이 줄줄이 풀려나는 것은 일부 시민들의 법감정과 충돌하며 논란을 낳고 있다. 일반 사건에서 보석 허가율이 떨어지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통계상 최근 10년간 보석 허가율은 꾸준히 감소했다. 2013년 40.4%였던 허가율이 지난해엔 26%로 줄었다. 올해 8월까지 허가율도 28.9% 수준이다. 재판에 넘겨진 형사 피고인 중 구속 기소된 비율(1심 기준)은 2015년 13.02%에서 2021년 8.3%로 감소세인데, 1심 전체 보석 신청은 연 6000건 내외로 비슷하다. 법원 내부에선 “영장 청구단계·실질심사 등으로 구속이 꼭 필요한 피고인만 추린 다음이라, 보석 신청을 해도 허가가 잘 나지 않았을 수 있다”(김윤선 사법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부장판사)는 해석이 나온다. 구속 기소 감소를 검·경 수사권 조정의 여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구속기간보다 길어진 재판…‘할 수 없이’ 보석↑
지난 2월 ‘법원의 구속기간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낸 김윤선 부장판사는 판사 15명을 인터뷰 해 “구속기간 내에 주요 증인에 대한 증인신문을 마치기 위해 노력하지만, 구속기간 만료가 임박하면 보석으로 피고인을 석방한다”는 공통된 답변을 받았다. 재판 지연의 영향은 피고인의 신청이 없는 데도 재판부가 보석을 허가하는 ‘직권 보석’의 증가로도 나타난다. 최근 3년간 256건→315건→349건(2022년)로 꾸준히 늘었다. 이것 역시 “구속기간 만료 전에 끝나지 않는 재판이 많아져, 재판부가 필요에 의해 결정한 보석”이란 게 김 부장판사의 분석이다.
검찰도 ‘아쉬워’ 법원도 ‘난감해’
주요 사건 피고인들 구속 기간도 채우지 않고 풀려나는 상황이 가장 마뜩잖은 건 검찰이다. 서울의 한 검사장은 “거물급 피고인들이 재판을 끌면서 보석으로 금세 풀려나는 게 지금 전국적 문제”라며 “법원이 매일 밤늦게까지 재판 속행하던 분위기가 사라지자 변호인들은 재판부 눈치도 보지 않고 각종 재판 지연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도권의 한 차장검사는 “수사할 때 증거 확보가 끝났더라도, 보석 이후에 피고인이 공범 등과 ‘말 맞추기’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공범 간 접촉 금지 등이 조건이긴 하지만 조건 준수를 담보할 방법이 없는 게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재판부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도주 우려’가 현실화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라임사태 주범’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2022년 11월), ‘함바왕’ 유상봉(2021년 7월)이 대표적인 사례다. 검찰과 경찰이 전자장치까지 끊고 도주한 김 전 회장을 48일, 유상봉씨를 15일 동안 쫓아다녀야 하는 일이 벌어지자 여론의 화살은 법원을 향했다. 최근에도 중앙지법에서 보석으로 풀려난 사기 피고인이 선고일을 앞두고 도망쳐 잠적한 사례가 나왔다.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연평균 221명의 피고인이 조건 위반으로 보석 취소 결정을 받았다. 한 형사사건 전담 판사는 “증거인멸 사유가 없고 피해 회복 노력이 있으면 가급적 풀어주려고 하지만, 매번 혹시 재판에 안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든다”고 털어놨다.
“無조건 만기석방보단 조건부 보석석방”
그럼에도 재판부가 보석을 허가하는 건 “(구속기간 만료로) 그냥 풀어주는 것보단 조건부 보석이 낫기 때문”(지방법원 부장판사)이다. 보석허용이 궁여지책이란 의미다. 보석금·거주지 제한 외에도 사건 관련인 접촉 제한·SNS 금지 등 증거인멸 시도를 제한하는 여러 조건을 달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진상 전 실장의 보석심문 당시 재판부는 “(김만배 등) 이 사건 관련인들의 증거인멸·자해 시도 전례가 있어 만기 석방은 우려된다”며 사건 관련자 접촉 제한 등 상세한 조건을 붙여 허용했다. 법원은 대장동·백현동 의혹 등으로 얽혀있는 김용·정진상·김인섭 등에게 보석을 허용할 때도 ‘사건 관련자들과 통화·문자·SNS·제3자를 통한 간접 접촉 금지’와 ‘실시간 위치추적 장치 부착’ 등의 조건을 달았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안성훈 박사는 “재판지연은 단숨에 해결되는 상황은 아니지만, 구속기간 연장도 국민 법 감정상 쉽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긴 하다”며 “구속 피고인의 증감 현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제도적 복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연·김정민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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