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의 마켓 나우] 반도체 망하게 하는 ‘침묵의 카르텔’
일본 반도체 몰락의 원인으로 1985년 플라자합의와 과잉기술로 인한 경쟁력 상실이 자주 지목된다. 그러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상위 기업 순위에서 사라지기까지 1985년부터 35년이 걸린 것을 보면 이들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쇠락하는 일본 반도체 산업을 지켜보면서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던 ‘침묵의 카르텔’이 진정한 원인이 아닐까. ‘침묵의 카르텔’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안이나 현상 등에 대해 조직적인 침묵과 은폐로 맞서는 집단이다.
우리나라에도 반도체 경쟁력을 약화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있다면, 두고 볼 것인가. 경쟁국들은 당장 투입 가능한 고급인력을 전 세계에서 영입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한다. 대만은 3, 4년 전부터 일본 대학과 연계를 확대해 일본 전문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기반을 다졌다. 미국의 한 반도체 기업은 박사초임을 30% 일괄 인상하는 등 고임금을 제시하면서 소프트웨어 분야에 뺏긴 인력을 되찾아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국은 ‘천인계획(千人計劃)’으로 외국 고급 인력 흡수를 계속 시도한다.
반면, 우리나라 인력정책은 ‘반도체 계약학과’ 설립, 소재·부품·장비 전문교육프로그램 도입 등 장기 대책 위주다. 고급인력을 당장 외국에 뺏기는 것을 막는 대책은 안 보인다. 퇴직 고급 인력의 활용, 다른 분야 전문인력의 재교육, 퇴직연령 연장, 해외전문가 영입 활성화 등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 중심의 인력 양성이 반도체 전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안처럼 제시되고 있는 현 상황을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피할 수 없다.
두 가지가 두드러진다. 첫째, 각종 인력양성 프로그램에서 국가지원금을 확보하려는 집단이기주의다. 둘째, 경쟁국들과 치열한 경쟁에서 실효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각종 정책 대안을 고민하지 않고 ‘인력 양성만 하면 나머지는 민간 기업이 다 잘 알아서 하겠지’라며 대충 넘어가려는 안일함이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것은 십만양병설 같은 탁상공론보다 거북선과 화포로 상징되는 경쟁력 있는 선도기술, 민간인을 병력으로 전환하는 의병활동, 의병장이나 이순신 같은 새로운 리더십의 출현 등 혁신 요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력양성은 당연히 언제나 해야 하는 일상일 뿐이지 정책이 될 수 없으며, 반도체 세계대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대안이 될 수도 없다. 지금은 ‘반도체 십만양병설’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의 거북선 같은 초격차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잘 정돈된 산·학·연 연계 협력 시스템을 만들 방법과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치밀하고 과감하고 도전적인 반도체기술 개발 전략을 논의할 때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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