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의 몰락, 박정희식 성장 모델에 작별을 고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 22]

고대훈, 강병철, 오욱진, 우수진 2023. 10. 1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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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육성 회고록 〈22〉


1998년 1월 24일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제2의 6·25’라고도 했다. 대한민국에 먹구름을 몰고 온 외환위기 얘기다.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에 당선된 나, 김대중(DJ)은 당선자로서 첫날부터 생존의 갈림길에 선 한국 경제에 매달렸다.

구제금융을 받고 경제 주권을 바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가 본격화한 시기였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터질지 조마조마했다.

당선 이틀째인 20일에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불렀다. 나라 곳간 상태가 궁금했다.

“현재 외환보유액이 30억7000만 달러에 불과합니다. 당장 내년 1월 만기의 외채가 돌아오면 갚기 어렵습니다.”

곳간이 텅 비어 있다는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나라 경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 파산의 벼랑으로 치닫고 있음을 절감했다.

외환위기는 성장지상주의에 매달려 온 ‘박정희식 발전 모델’에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라고 본다. 당시 기업들은 경쟁력과 수익성을 외면한 채 문어발식 외형적 성장에 빠져 있었다.

권력과 결탁해 금융기관의 특혜 대출을 받아 덩치만 키웠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배짱으로 배수진까지 쳤다.

방만한 경영 속에 위기가 닥치자 부실해진 기업과 금융기관은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정부의 오판과 대응 실패로 국가 부도의 수렁으로 몰렸다. 이것이 외환위기 사태의 본질이다.

박정희 개발독재 vs 대중경제론

1986년 출간된 『대중경제론』.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나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에 대해 오래전부터 문제의식을 가졌다. 안티테제(대항 논리)로 주창해 온 청사진이 나의 ‘대중경제론’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의욕과 자신감을 국민에게 불러일으킨 공로는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토대로 한 공업화, 수출 증대, 경제 성장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소득을 분배하는 일에 무지했다.

박정희 정권은 소수에게 특혜와 특권을 주는 방식으로 발전을 추진했다. “길거리 거지도 정부가 하루아침에 부자를 만들 수 있다” “싼 이자로 은행 돈을 빌려 사채놀이만 하면 부자가 된다”는 말까지 시중에 나돌 정도였다.

이런 방식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 위에 대기업에 특혜를 몰아줬다. 농민과 노동자는 저곡가와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중산층으로 올라서기 어려운 왜곡된 경제 체제가 굳어졌다. 공업과 농업, 대기업과 중소기업,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이 심화했다.

대중경제론은 이런 인식에서 비롯됐다. 대중이 주체적으로 경제 정책의 수립과 운영에 참여하고, 공정한 분배를 받음으로써 ‘중산층이 튼튼한 다이아몬드형 사회’를 추구하는 구상이다.

『대중경제론』은 71년 대선을 앞두고 펴낸 『김대중씨의 대중경제 100문 100답』에서 출발해 86년 집대성했다.

산업사회 시대 사고에 매인 민주노총

1998년 2월 25일 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희호 여사와 함께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기록관]

IMF 요구에 따라 4대 부문(기업·금융·공공·노동) 개혁에 나섰다. 어려웠던 노동 부문에선 노사정위원회(초대 한광옥 위원장)를 출범시키는 성과를 냈다. 무한경쟁 시대에 노사가 과거와 같이 싸움만 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노동자·기업가·정부가 공동의 이익과 손해를 어떻게 공정하게 분담하느냐가 관건이다. 노사정위는 3자의 지혜를 모을 협의의 공간으로서 존재 이유가 충분하다.

노사정위를 운영하면서 민주노총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민주노총은 거부하다, 참가하다, 나가버리는 일을 반복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 참여를 마치 기업과 정부에 회유당한 것으로 오해했다. 과거 산업사회 시대의 사고방식에 얽매인 민주노총이 안타까웠다.

기업 개혁은 매우 험난했다. 박정희식 개발 모델과 작별할 때가 됐다. 재벌의 선단식 경영체제, 재벌 성장의 주요 수단이었던 관치금융·정경유착·족벌경영 등 폐해를 혁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재벌들은 구조조정에 소극적이었다. 대우그룹의 해체 과정을 얘기하겠다.

나는 98년 1월 24일 서울 삼청동 인수위 사무실에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단독 면담했다. 나는 김 회장의 경영 능력과 품성을 높이 평가했다. 야당 시절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 인연을 잊지 않고 있었다.

(DJ) “새 정부는 정경유착이나 관치금융 등 과거의 관행을 완전히 배제할 것입니다. 대기업들도 정부의 도움을 청하지 말고 자율적으로 신속히 구조조정을 해야 합니다.”

(김우중) “재계가 구조조정을 확실하게 해야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2월 중 획기적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해 모범을 보이겠습니다.”

솔선수범을 보이려던 김 회장이 고마웠다. 그런데 며칠 뒤인 2월 초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김 회장은 뜻밖의 발언을 했다.

“대우의 구조조정은 옥포조선소 인수 이후 80년에 다 했다. 앞으로 발표할 경영 혁신에 특별한 구조조정은 없다.”

동행한 유종근 대통령 당선인 경제고문에게 “대기업만 잘못했다고 하면 어떡하느냐”며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설전까지 벌였다.

재계의 불만을 대변한 돌출 발언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나와 나눈 대화와는 거리가 있는 말이어서 의아했다.

하노이까지 찾아온 김우중의 호소

김경진 기자

같은 해 10월 일본 노무라증권은 ‘대우그룹에 비상벨이 울린다(Alarm bells for Daewoo Group)’는 보고서를 냈다. ‘최악의 경우 대우가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외국 은행은 물론 국내 은행들까지도 채권 회수에 나서면서 자금난에 빠졌다.

이즈음 김 회장이 김중권 비서실장을 통해 나를 급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청와대에서 독대한 김 회장은 빅딜(대기업 간 사업교환)을 꺼냈다.

“부실한 삼성자동차(현 르노코리아자동차)를 인수하고, 대우전자(현 위니아전자)를 삼성그룹에 넘기는 빅딜에 나서겠습니다.”

나는 대기업 간 빅딜을 주문한 상태였다. 경쟁력도 없으면서 무분별하게 벌인 중복 투자를 바로잡으려면 기업 간 빅딜은 환란 극복을 위해 절실했다.

재벌 간 첫 빅딜 시도이었기에 김 회장이 또 고마웠다.

그러나 대우의 구상은 시장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너무 늦었다. “대우는 빚이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로 경영이 방만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다급해진 김 회장은 나를 만나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던 베트남 하노이로 날아왔다. 12월 15일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조찬을 함께했다.

(김우중) “획기적인 지원이 절박합니다.”

(DJ) “강봉균 경제수석에게 검토해 보라고 하겠습니다.”

강 수석은 금융감독위와 검토해 봤으나 대우의 해외 사업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지원해 주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우전자-삼성차 빅딜도 무산됐다.

빚내서 몸집 불리는 시대 종언

나는 5대 재벌도 워크아웃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99년 4월 재계·정부·금융기관 간담회를 주재한 자리에서 선언했다.

“대기업의 개혁 노력이 미흡합니다. 5대 그룹이 약속한 구조조정을 등한히해 경제 전체에 해를 끼치는 기업에 대해서는 금융기관을 통한 합법적 개입을 할 것입니다.”

나의 경고를 의식한 듯 김 회장은 대우중공업 조선부문(현 한화오션)과 힐튼호텔 등 10여 개 핵심 계열사 및 사업을 매각하는 구조조정에 나섰다. 하지만 시장 반응은 싸늘했다.

김 회장은 10조원대의 재산을 담보로 내놓는 등 추가 자구책을 내놨지만 허사였다. 결국 그해 8월 ㈜대우·대우중공업·대우자동차 등 12개 계열사가 워크아웃 절차를 밟았다. 재계 3위였던 대우그룹은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두 달 뒤 출국한 김 회장은 방랑객 신세로 해외를 2005년까지 떠돌았다.

나는 김 회장을 믿었다. 하지만 그는 내 의지를 경시하고, 시장 움직임을 과소평가했다. 그가 약속했던 빅딜 등 구조조정을 왜 망설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김 회장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세계경영’을 외치던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그러나 빚을 내서 몸집을 불리고, 분식회계를 통해 부실의 실체를 숨기는 수법이 더는 통하지 않는 새 시대가 도래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 22

김우중의 몰락과 대우 해체는 내가 정말 원하지 않은 불행한 결말이었다. 그의 성장 신화를 묻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대우 사태가 박정희식 개발 모델의 퇴장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기록될지언정 말이다.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은 QR코드를 스캔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8607

23회 〈왜 햇볕정책이었나〉가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고대훈·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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