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말 사이 거대한 우주를 보는 사람, 이승우”
“한국 문단에서 ‘관념적’이라는 평은 욕이에요. 한마디로 지나치게 사색적이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는 의미죠. 관념적이라는 말이 욕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건 우리의 사상적 토대가 빈약하다는 방증입니다. 깊게 생각하는 연습이 안 돼 있어서 그런 책을 읽는 게 어려운 거죠.”
60년간 문학 연구의 외길을 걸어온 원로 문학평론가 김주연(82)은 한국 문학의 경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근 소설가 이승우(64)의 작품 세계를 분석한 연구서 『이승우의 사랑』(사진·문학과지성사)을 내놨다. 고전을 남기고 작고한 거장이 아닌 동시대의 작가, 그것도 대중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작가를 연구한 이유를 묻자 그는 “한국 현존 작가 중 가장 깊이가 있는 작가”라는 답을 내놨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김 평론가를 만났다.
“흔히 한국 문학은 깊이가 얕다고 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읽고 나면 허무하다는 거죠. 그 깊이의 부재는 결국 사상의 부재거든요. 그런 점에서 이승우는 한국 문단에서 보기 드문 작가입니다. 고독, 욕망, 죄의식, 사랑, 인간의 양면성 같은 심오하고 철학적인 테마에 평생 천착했으니까요.”
이승우는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사랑받는 작가다. 프랑스 명문 출판사 갈리마르가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엮어내는 ‘폴리오 시리즈’에 이승우의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이 한국 소설로는 처음으로 2009년 포함됐다. 장편 『생의 이면』은 2000년 프랑스 페미나 문학상 외국어 소설 부문 최종심 후보에 올랐다.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르 클레지오는 이승우 작가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김 평론가는 “이승우는 한국인의 한(恨)이나 정(情) 같은 특수한 정서보다 인류 보편의 정서를 기독교적인 세계관 위에서 다루는 작가”라며 “그런 점이 서구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유리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승우는 1981년 장편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22살의 천재’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단했다. 이전의 한국 문학이 다루지 않았던 형이상학적, 종교적 색채를 담 은 소설로 평단의 호평을 얻었다.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 『지상의 노래』를 비롯해 자전적 색채가 짙은 『생의 이면』, 인간의 죄의식을 다룬 『캉탕』 등을 통해 신성(神性)과 인간성, 원죄와 구원, 신앙과 삶 등에 대한 성찰을 풀어냈다.
이승우가 다룬 여러 테마 중 ‘사랑’을 고른 이유를 물었다. “이승우는 사랑을 아주 집요하게 다룹니다.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항상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져요. ‘사랑해서 행복하다’가 아니라 ‘그렇다면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방점을 찍는 거죠. 반대로 사랑 때문에 슬플 때는 ‘실연의 아픔으로 슬프다’에서 한 발 더 들어가 ‘이 슬픔은 나의 어떤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이승우의 문학입니다.”
이런 이승우의 문학적 지향은 60년간 문학을 연구해온 김 평론가의 문학관과도 맞닿아있다. 원로 비평가는 챗GPT를 예로 들며 문학의 역할을 설명했다. “챗GPT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요? 챗GPT는 ‘답’입니다. 반대로 문학은 ‘질문’이에요. 고뇌하고 질문하는 게 문학이라는 말이죠. ‘인공지능의 시대가 왔으니 문학도 챗GPT와 협업해야 한다’는 주장에 저는 동의하지 못하겠어요. 챗GPT가 인간의 죄의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고민하나요? 사랑이 무엇인지 성찰할까요?”
척박한 언어 환경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았다. “뭐든지 대박 아니면 쪽박이라고 표현하는, 두루뭉술하게 퉁치는 언어 습관이 문제”라면서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잖아요. ‘아’와 ‘어’ 사이에 거대한 우주가 있다고 보는 게 문학이거든요. 그런데 ‘멋있다’ ‘기쁘다’ ‘일이 잘 풀렸다’ ‘재밌다’ ‘근사하다’ ‘흥분된다’를 전부 ‘대박’이라고 표현하잖아요. 뭐든지 아주 심플하게, 쉽게 만드는 거죠. 이런 습관이 사람들을 문학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는 입문자에게 추천하는 이승우의 소설로 『사랑의 생애』를 꼽았다.
“남녀의 사랑을 철저하게 해부하는 작품입니다. 삼각관계에 얽힌 남녀가 주인공이에요. 이승우 작품 중에는 드물게 통속적이면서도, ‘그래서 사랑이 뭔데?’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이어나가는 소설입니다. 마치 이런 소설도 쓸 수 있다고 작정하고 쓴 것 같아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요소를 담아내면서도 사유를 포기하지 않은, 정교하게 절충된 작품입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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