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 가족이 함께한 덕수궁 야경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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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정 기자]
"서울에는 모두 몇 개의 궁궐이 있을까요?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그리고 여기 덕수궁. 모두 다섯 개입니다."
덕수궁에서 만났던 역사 해설사님이 다 잊어도 이것만은 꼭 기억하라고 하셨다. 서울의 궁은 모두 다섯 개라는 거.
며칠 전 티켓 사이트에서 <덕수궁 야경투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몇 십 년을 서울에 살면서 야간에 궁을 개방하는 줄 몰랐다. 1인당 1만 원 정도의 금액을 결제하면 역사 해설사와 함께 덕수궁을 돌면서 궁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멋진 야경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이거 꽤 괜찮은 걸. 남편, 초3 딸과 함께 갈 생각으로 3장을 예매했다.
10월 14일 토요일, 오전에 갑자기 굵은 비가 쏟아졌다.
"비 와서 안 되겠다. 우리 가지 말자."
피곤하다며 가기 싫어했던 남편에게는 이 비가 반갑겠지만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조금 있다가 그칠 거야."
나는 만약에 비가 계속 내린다면 비옷이라도 챙겨 입고 갈 생각이었는데 오후가 되자 다행히 비가 그쳤다. 궁 안은 밤에 쌀쌀하다는 안내를 받은 데다가 비까지 내린 터라 때 이른 초겨울 외투를 꺼내 입었다.
▲ 정동축제 정동 문화공간 |
ⓒ 윤용정 |
이른 저녁은 먹은 오후 여섯 시쯤 어둑어둑해진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 해설사를 만나기로 한 금천교 옆으로 갔다. 함께 해설을 들을 인원은 모두 열 명이었다. 우리처럼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 대부분이었고 연인도 한 커플 있었다.
덕수궁은 다른 궁에 비해서 매우 작다. 그 이유가 원인 모를 화재로 인해 3분의 2가량이 불에 탔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원래 궁의 3분의 1 규모라고 한다. 궁 안을 돌며 여기서는 고종이 위폐 되어 지냈고, 여기서는 어떤 왕과 대비가 지냈다는 이야기들을 열심히 들었는데... 사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덕수궁에 살았던 왕과 왕의 가족들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겠다는 느낌이 남았을 뿐이다.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독립운동을 위해 그 많은 재산을 내놓고 헌신한 이회영선생과 여섯 형제 이야기,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많은 약을 팔고도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늘 적자였던 활명수를 만든 기업 부채표 이야기, 일제가 우리 문화를 훼손하기 위해 궁을 뜯어다가 전시하고 마음대로 팔아먹은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말의 유래도 몇 가지 기억에 남는다. 처마 밑에 새가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려고 꽂아둔 꼬챙이를 회꼬지라 불렀는데 그게 요즘 쓰는 말 '해코지하다'가 되었다. 그 이후에는 처마 밑에 그물망을 쳐두어서 새들이 처마 밑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그래서 나온 말이 '망쳤다'라고 한다.
▲ 덕수궁 야경 아름다운 덕수궁의 야경 |
ⓒ 윤용정 |
중학교 때 나는 수학 다음으로 역사를 포기했다. 역사는 숫자를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왕의 즉위 순서를 외우고 사건의 연도를 외우는 것에 질린 나는 역사가 재미 없었다.
오늘 만난 해설사님은 이 일에 굉장한 사명감을 가진 분으로 보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눈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완전히 몰입해서 들었고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을 때는 너무 감동받아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역사에 더 관심을 갖고 훼손되고 왜곡된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원래 재미있는 과목이었다.
남편과 초3 딸이 두 시간 동안 지루해 하지 않을까? 힘들다고 투덜거리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정말 시간이 빨리 지나갔고 즐거워했다. 남편이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어디 가자고 하면 되게 귀찮은데 또 막상 나와보면 재밌어, 그치?"
"응, 맞아."
▲ 덕수궁야경 서늘한 덕수궁을 돌며 더 친해진 우리 가족 |
ⓒ 윤용정 |
그냥 천천히 둘러봤다면 이십 분이면 다 둘러볼 공간을 두 시간 넘게 돌았다. 끝까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애쓴 열정의 해설사님께,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박수를 보냈다.
일정이 다 끝나고 나서 사진도 찍고 천천히 한번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8시 40분쯤 되자(9시 종료) 지휘봉을 든 분들이 바깥쪽으로 사람들을 유도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며 단풍이 들 때 혹은 봄에 석어당 앞 살구꽃이 필 때 한 번 더 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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