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 가족이 함께한 덕수궁 야경투어

윤용정 2023. 10. 1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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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정 기자]

"서울에는 모두 몇 개의 궁궐이 있을까요?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그리고 여기 덕수궁. 모두 다섯 개입니다."

덕수궁에서 만났던 역사 해설사님이 다 잊어도 이것만은 꼭 기억하라고 하셨다. 서울의 궁은 모두 다섯 개라는 거.

며칠 전 티켓 사이트에서 <덕수궁 야경투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몇 십 년을 서울에 살면서 야간에 궁을 개방하는 줄 몰랐다. 1인당 1만 원 정도의 금액을 결제하면 역사 해설사와 함께 덕수궁을 돌면서 궁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멋진 야경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이거 꽤 괜찮은 걸. 남편, 초3 딸과 함께 갈 생각으로 3장을 예매했다.

10월 14일 토요일, 오전에 갑자기 굵은 비가 쏟아졌다.

"비 와서 안 되겠다. 우리 가지 말자."

피곤하다며 가기 싫어했던 남편에게는 이 비가 반갑겠지만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조금 있다가 그칠 거야."

나는 만약에 비가 계속 내린다면 비옷이라도 챙겨 입고 갈 생각이었는데 오후가 되자 다행히 비가 그쳤다. 궁 안은 밤에 쌀쌀하다는 안내를 받은 데다가 비까지 내린 터라 때 이른 초겨울 외투를 꺼내 입었다.

예약한 시간보다 두어 시간 일찍 덕수궁 앞에 도착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13, 14일 이틀간 '정동 야행'이라는 축제를 하고 있어 사람들로 붐볐다. 거리공연과 체험부스, 먹거리 트럭이 늘어서 있었고 정동제일교회, 정동극장, 구세군역사박물관 등 정동에 위치한 문화공간을 방문하면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행사 안내지를 들고 걸으며 보이는 곳마다 들러 스탬프를 받았다.
 
▲ 정동축제 정동 문화공간
ⓒ 윤용정
    
이른 저녁은 먹은 오후 여섯 시쯤 어둑어둑해진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 해설사를 만나기로 한 금천교 옆으로 갔다. 함께 해설을 들을 인원은 모두 열 명이었다. 우리처럼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이 대부분이었고 연인도 한 커플 있었다.

덕수궁은 다른 궁에 비해서 매우 작다. 그 이유가 원인 모를 화재로 인해 3분의 2가량이 불에 탔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원래 궁의 3분의 1 규모라고 한다. 궁 안을 돌며 여기서는 고종이 위폐 되어 지냈고, 여기서는 어떤 왕과 대비가 지냈다는 이야기들을 열심히 들었는데... 사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덕수궁에 살았던 왕과 왕의 가족들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겠다는 느낌이 남았을 뿐이다.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독립운동을 위해 그 많은 재산을 내놓고 헌신한 이회영선생과 여섯 형제 이야기,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많은 약을 팔고도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늘 적자였던 활명수를 만든 기업 부채표 이야기, 일제가 우리 문화를 훼손하기 위해 궁을 뜯어다가 전시하고 마음대로 팔아먹은 이야기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말의 유래도 몇 가지 기억에 남는다. 처마 밑에 새가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려고 꽂아둔 꼬챙이를 회꼬지라 불렀는데 그게 요즘 쓰는 말 '해코지하다'가 되었다. 그 이후에는 처마 밑에 그물망을 쳐두어서 새들이 처마 밑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그래서 나온 말이 '망쳤다'라고 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1월, 안 그래도 추운데 나라까지 빼앗겼으니 백성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그래서 날씨가 춥고 으스스할 때 '을사년스럽다'라는 말을 썼고 오늘날 '을씨년스럽다'가 되었다고 한다.
 
▲ 덕수궁 야경 아름다운 덕수궁의 야경
ⓒ 윤용정
 
중학교 때 나는 수학 다음으로 역사를 포기했다. 역사는 숫자를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왕의 즉위 순서를 외우고 사건의 연도를 외우는 것에 질린 나는 역사가 재미 없었다.

오늘 만난 해설사님은 이 일에 굉장한 사명감을 가진 분으로 보였다. 이야기를 하면서 눈빛이 반짝거렸다.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완전히 몰입해서 들었고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을 때는 너무 감동받아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역사에 더 관심을 갖고 훼손되고 왜곡된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는 원래 재미있는 과목이었다.

남편과 초3 딸이 두 시간 동안 지루해 하지 않을까? 힘들다고 투덜거리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정말 시간이 빨리 지나갔고 즐거워했다. 남편이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어디 가자고 하면 되게 귀찮은데 또 막상 나와보면 재밌어, 그치?"
"응, 맞아."

예상대로 궁궐의 밤은 꽤 서늘했다. 해설사님의 말로는 한이 많이 서려서 그렇다고. 우리는 꼭 붙어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궁궐을 돌았다.
 
▲ 덕수궁야경 서늘한 덕수궁을 돌며 더 친해진 우리 가족
ⓒ 윤용정
 
그냥 천천히 둘러봤다면 이십 분이면 다 둘러볼 공간을 두 시간 넘게 돌았다. 끝까지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애쓴 열정의 해설사님께,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박수를 보냈다.

일정이 다 끝나고 나서 사진도 찍고 천천히 한번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8시 40분쯤 되자(9시 종료) 지휘봉을 든 분들이 바깥쪽으로 사람들을 유도했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며 단풍이 들 때 혹은 봄에 석어당 앞 살구꽃이 필 때 한 번 더 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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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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