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아내 귀에 대고 "공산당이 싫어요"라니 [수산봉수 제주살이]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와 인문학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제주인과 나의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 <편집자말>
[이봉수 기자]
▲ 키아오라리조트와 한미리스쿨 키아오라리조트와 한미리스쿨의 밤 풍경. 나의 제주살이에 관한 글이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문집’에서 유일하게 빠져 논란이 일었다. |
ⓒ 이봉수 |
고교 동기회 단체대화방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나
13일 밤, 페이스북에 'TK 출신이 살아가기 힘든 이유'라는 글을 올렸다. 아래 첨부한 대로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문집'에 내 원고가 실리지 않은 섭섭함을 토로한 글이었다. 그 글에는 폐기된 내 원고도 첨부했다. 페이스북 글을 본 한 동기생은 단체채팅방을 통해 편집위원회에 내 원고가 빠진 이유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톡의 의견은 문제 제기에 동의하는 이는 소수였고, 다수는 '조용히 대화로 해결하지 글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거나 '공개질의서에 답하라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적합한 접근법이 아닌 것 같다'는 식이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글을 뺀 당사자인 편집장은 경위 해명이나 사과는커녕 다수 의견에 '좋아요'를 누르는 식으로 대응했다.
나도 처음에는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스스로 사과하겠지' 하는 기대도 있었다. 동기생 단톡에 피해자인 나의 의견을 일절 밝히지 않은 것도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대중매체에 싣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첫째, 동기회 카톡에서 그런 공방을 더 이상 벌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동기회장 등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명을 밝히는 것을 원칙으로 기자 생활을 해왔지만 이 글에서는 동기생들을 배려해 실명은 물론 출신 고교 이름도 밝히지 않겠다. 특정학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나는 페이스북에도 학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둘째, 동창회나 다른 친목 모임에서도 툭하면 '사상 시비'가 붙는 자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를 뿐더러 그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념 과잉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삶 자체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일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가입의사도 없이 소속되기 때문에 편안해야 할 일차원적 공동체에서 소수에게 낙인을 찍어 배제하는 문화가 싹트는 정도가 아니라 무성해지면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우리 사회에 뿌리박은 차별의식이나 '구별짓기'가 비공식 모임 안에서도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 글을 본 수많은 언론인 등은 자기 경험을 털어놨고, 그중에는 개인적으로 부담되겠지만 개인 문제가 아니니 공론화의 첫발을 내디뎠으면 좋겠다고 전화해준 이들도 있다. 기사로 쓰려고 취재하려는 이도 있었는데 자칫 왜곡될 수도 있어 불응하고 내가 직접 쓰기로 했다.
'내가 하는 일'이 공산당이 하는 일인가?
셋째, 결정적 요인은 한 동기생이 너무나 심한 모욕을 내 배우자에게 퍼부은 사실을 이번 일이 터지고야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송년회에서 부인들만 10여 명 앉아있는 둥근 식탁에 한 동기생이 찾아와 "이봉수 부인이시죠"라며 말을 걸더니 귀에다 대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직전에 무대로 나가 뜬금없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부르짖고 내려가길래 나를 겨냥한 줄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데, 만만한 이에게 '확인 사살'을 한 거였다. 그가 바로 이번에 편집장을 맡은 동기생이다.
당시 "너무나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말을 어제 전해 듣고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고 불같이 화를 냈더니 "당신한테 말했으면 동창회 자리가 어떻게 됐겠느냐"고 반문했다. 아내는 안 그래도 칼럼 댓글 등으로 수없이 '좌빨' '공산당' 소리를 들어 우울증까지 있는 남편을 보호하려고 여태 참아왔던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삼성 재벌과 맞서다가 <한겨레>를 그만두고 나이 마흔일곱에 유학을 떠나, 영국에서 외국인 하숙을 치며 일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TK 출신은 중도진보 성향만 있어도 얽히고설킨 혈연·지연·학연 속에서 살아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침묵의 나선 이론'이 밝혀낸 것처럼, 신념과 다른 말을 듣더라도 반박하지 못하고 속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TK지역은 원래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본거지였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남인의 세거지로서 기득권층인 노론에 목숨 걸고 저항했고 일제시대에는 좌우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지역이다. 심지어 박정희 시대에도 저항정신을 이어가다가 인혁당 사건 등으로 억울한 희생을 치른 곳이다. 뒤늦게 재심에서 무죄 판결들을 받았지만 대구의 혁신세력이 멸절되는 한 요인이었다.
초·중·고 동창회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미리 가짜뉴스를 가지고 나를 설득하다가 안 되면 "뉴스도 안 보나" "공부 쫌 해라" "책 좀 읽어라" 같은 말을 듣기 일쑤다. 초중고 동창생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려고 60만 원쯤 들여 원하는 이 모두에게 내 책을 선물하기도 했는데 효과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칼럼으로 대선후보 홍준표를 비판했을 때는 같은 TK인 세명대 교수로부터 "다음 정권에서 한 자리 하려고 커밍아웃하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국회 등 관변 쪽에서 요직을 제안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다 거절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 국회 언론중재법 개정 전문가 진술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가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언론중재법 개정안 관련 전문가 의견진술을 하고 있다. |
ⓒ 국회 영상회의록 |
태극기집회에 나가서 인증샷을 찍어 카톡에 올리는 친구도 있는데, 그런 행위도 나는 '다름'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아는 사람에게도 대놓고 모욕하거나 배제하는 경향은 이 정권 들어 훨씬 더 심해졌다.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고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페북글] TK 출신이 살아가기 힘든 이유
원고가 아예 실리지 않고 '몰고'되는 일이 발생해 울화병이 도졌다. 대중매체도 아니고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문집'이 어제 배송됐는데 내가 보낸 글이 빠진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언론계 언저리에서 40년간 글을 써오면서도 원고가 아예 실리지 않은 일은 <조선일보> 시절 한 번 있었는데 두 번째 몰고를 당한 것이다. 그것도 동창문집에서!! 언론사는 전직하면 되는데 동창회는 옮겨갈 수도 없고...ㅠ
나는 사실 너무 일이 밀려있기도 했지만 동기회장의 거듭된 독촉 전화가 없었더라면 원고를 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주살이와 활동상, 졸업 50년 소회 등을 써 보내 달라고 해서, 키아오라리조트와 한미리스쿨 관련 글을 뒤에 붙이고 앞에는 동창회에서 때로는 '좌빨'로 몰리는 억울함을 토로했다.
591쪽이나 되는 두툼한 문집을 정성들여 만들면서 왜 내 원고만 쏙 뺐을까? 동기회장과 사무총장 등에게 알아보니 편집장을 맡은 동기가 내 글에 거부감을 가진 게 주된 이유였다. '원고가 너무 길었다'는 이유를 댔다지만 줄여달라는 통보를 받은 적도 없고 훨씬 더 긴 글들도 실려 있어, 둘러대는 '억지 핑계'로 여겨졌다.
편집장은 편집후기에서 '보태거나 덜지 않았고 꾸미거나 숨기지 않았다'고 썼는데 내 글만 예외였나? 동창문집마저 '사상검열'을 하는 현실에 화가 치민다. 머리가 크면서 각자 생각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서글프다. 고향과 동창회는 세파에 지친 심신을 위로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어쭙잖은 이념이 젊은 시절의 '화양연화'마저 허물고 있다.
동창회 같은 데서 정치나 종교에 관한 신념을 드러내는 일은 삼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 그런 모임의 단톡 등에는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는 글을 올리지 않는다. 그러면 아래 글이 과연 선을 넘은 것인가?(페친들께서 한 번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다)
[폐기된 원고] 내가 제주에서 펜션과 스쿨을 운영하는 이유
내가 혐오하는 표현 '좌빨'
(TK 출신인) 내가 초중고 동창생들한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좌빨'이라는 혐오 표현이다. 그중에는 "니가 우야다 그리 됐노"라며 진정으로 나를 걱정해주는 이도 있다. 나는 한국에서 '진보성향'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유럽 기준으로는 보수에 가깝다. 영국 런던대 유학시절 페미니즘 이슈 등을 놓고 토론을 벌이면 나의 우파적 시각에 공격이 쏟아졌다.
진정한 보수는 애국적이고 공동체적 가치와 전통을 옹호한다. 나도 그렇다. 가족애, 절제와 겸손, 성실과 약자에 대한 의무, 신중함 등은 보편적 덕목이지만 보수적 가치에 더 근접해있다. 나도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원조 자유주의자 아담 스미스가 국가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개인을 불의와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고,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국가는 최소한의 권력을 공정하게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나는 그를 지지할뿐더러 지금도 아담스미스협회 회원이다.
"보수는 보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개혁해야 한다." 영국 보수주의 철학적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가 한 이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노동조건의 개선 없이 인민의 조건이 개선될 수 없다." 현실정치에서 영국 보수당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의 이 말에도 공감한다. 영국은 물론이고 독일의 복지제도도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확립한 것이 아니던가?
당신도 가짜뉴스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내가 언론학계 대다수 학자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언론개혁에 앞장섰던 이유는 가짜뉴스의 폐해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MBC저널리즘스쿨과 제주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격주로 오가며 강연하느라 항공기 직항노선이 없는 다른 지역 강연은 거절한다. 다만 대구 강연은 항공편이 뜸하고 저녁에 강연하면 하루 숙박해야 하는 게 불편해도 꼭 가는 이유가 있다.
OO일보대구지사가 주최하는 시민기자대학 그리고 대구문화재지킴이회 강연인데 4년째 다녀왔고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시민기자대학은 사업가 등 대구 유지들이 주요 수강생인데 처음엔 이런 일이 있었다. 원래 일면식도 없는 대구지사 간부들이 나를 섭외해 강사진 명단을 발표했는데 홈피에 "왜 이런 좌빨 강사를 데려왔느냐"는 댓글이 떴다는 거였다.
강연 도중 "대통령 후보 중 가장 억울한 낙선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누가 "이회창"이라고 답했다. 정답이다. 이른바 진보매체들은 병역브로커 김대업씨 말만 듣고 대서특필해 선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언론중재위와 1·2·3심 확정판결까지 4년이 걸렸고 정정기사를 냈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지연된 정정은 정정이 아니다. 피해의식이 강했기에 가짜뉴스까지 동원해 사생결단하는 선거 풍토가 생겨났다.
▲ 한미리스쿨 수업 한미리스쿨 초집중 언론인 양성과정 학생들이 컴퓨터로 보내준 PPT자료를 보며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
ⓒ 고지우 |
부자도 아닌 내가 수강료와 한 달 숙식 무료 '초집중 언론인 양성과정'을 운영하는 이유는 신뢰도 세계 꼴찌 수준인 한국언론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제1기 과정에 2000만 원쯤 들었지만 서울 명문대 출신의 언론사 입사 독과점에서 오는 언론의 지방 홀대와 서울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데도 작은 디딤돌이 되리라 믿는다.
수강생 선발 때도 나이 제한을 없애고, 지방대학과 저소득층 출신, 장애인에게 수학능력만 있다면 오히려 가점을 줬다. 지원자가 많이 몰렸지만 합격자 12명 중 '인서울 대학' 출신은 둘밖에 없었고 셋은 장애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심장병이 있던 학생은 끝내 입소하지 못했지만 우울증을 앓던 두 학생은 수료하고 나갈 무렵 "병이 다 나은 것 같다"며 표정이 밝아졌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입학·취업 경쟁이 청년들 건강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하루 12시간 강연과 실습을 강행하는데도 재미있게 공부했기에 힘든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스스로 성취감에 만족했다. 학생들은 생고생을 사서 한 나보다 90끼 밥을 해댄 마누라에게 더 큰 고마움을 표했다. 우울증을 앓던 한 학생은 합격 때까지 계속 머물겠다고 호소해 조훈현이 이창호를 키울 때처럼 내제자로 받아들였다. 식비 정도만 받고 석 달째 지도하고 있다.
(이하 생략, 전문은 페이스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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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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