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형제·국내 잠입·예술... 독립운동가 이육사와 정율성의 공통점
[황광우 작가]
▲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중국 귀하 음악가인 정율성 흉상이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푸른길 한편에 쓰러져 나뒹굴고 있다. 광주 모 교회 전도사 윤아무개(56)씨는 광주시의 정율성 기념사업 추진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 1일 오후 흉상에 밧줄을 묶고 차량으로 끌어내린 혐의(재물손괴)로 경찰에 입건됐다. 흉상은 지난 2009년 4월 중국 광저우시 해주구 청년연합회가 남광주청년회의소(JC)에 기증했고, 이후 남구에 전달되면서 이곳에 세워졌다 |
ⓒ 안현주 |
나는 현장에 달려갔다. 지나가는 한 시민이 말했다. "저 양반 동상은 중국에 설치되어야 해." 나는 시민에게 다가가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아니예요. 정율성 선생은 광주의 대표적인 자랑스런 독립운동가랍니다. 정율성 형제 4분이 모두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쳤어요. 큰 형은 상해임정 요인이었구요. 둘째형과 셋째 형은 의열단 단원이었습니다. 율성(律成)은 호인데요, 노래로 독립을 이루리라는 뜻이랍니다. 해방은 되었으나 고향 광주에 돌아올 수 없었던 비운의 독립투사였지요."
"(끄덕끄덕) 그런가요. 내가 잘못 알았네요."
일제강점기 4형제가 항일투쟁에 앞장 선 경우는 드물다. 안동의 이육사와 광주의 정율성 집안의 4형제가 독립의 대의에 청춘을 바쳤다. 이육사는 1904년생이고, 정율성은 1914년생이다. 정율성이 이육사보다 열 살 어리지만, 두 분이 걸어간 여정은 사뭇 흡사하다.
▲ 대구시 중구 삼덕동 삼덕교회 60주년기념관 1층에 있는 이육사 기념벽. |
ⓒ 조정훈 |
이육사는 6형제였다. 원기(源祺)와 원록(源祿), 원일(源一)과 원조(源朝), 원창(源昌)과 원홍(源洪)이다. 이육사는 6형제 중 둘째였다. 둘째 이원록이 우리가 아는 이육사의 본명이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으로 4형제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사건으로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정율성은 광주에서 태어났고, 능주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정율성의 두 형 효룡과 충룡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 일경의 추적을 따돌리고 두 형은 그해 상해로 떠났다. 효룡은 상해임시정부의 요원이 되었고, 여러 차례 옥살이를 하던 끝에 죽었다. 충룡은 의열단의 일원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1927년에 죽었다.
셋째 형 의은 역시 이름 그대로 의로운 삶을 살았다.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이 되었고, 졸업 후 신입생 조직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때 형 의은이 중국으로 데려간 동생이 있었으니 그가 정율성이다. 이육사의 형제들처럼 정율성의 4형제도 독립을 위해 청춘을 바쳤다.
이육사는 의열단의 지도자 윤세주의 감화를 받아 단원이 되었다.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하고 신입생 조직의 임무를 띠고 국내에 잠입하다가 체포되었다.
즉, 이육사는 정율성의 형 정의은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동기생으로, 둘 모두 신입생 조직책으로서 국내에 잠입하였다. 정의은은 호남 일대에서 신입생을 모집하였고, 이육사는 경상도 일대에서 신입생을 조직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두 사람의 스승
이육사를 의열단의 길로 이끈 윤세주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는 태항산에서 전사한 윤세주 선생의 무덤을 찾아 2005년 중국에 간 적이 있다. 나는 태항산이 서울의 관악산이나 광주의 무등산처럼 우뚝 솟은 산봉우리인 줄 알았다. 가서 보니 태항산은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처럼 거대한 산맥이었다.
태항산 여행을 마치고, 장츠대학의 총장과 회포를 푸는 자리에 참석했다. 총장의 비서는 '중국인들은 70도가 넘는 독주를 유리잔으로 세 잔을 마셔야 친구로 맞이한다'고 호기를 부렸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삼배 제의를 환영하오. 나는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친 중국과 조선의 연대를 기념하는 의미로 마시겠소. 1942년 일본은 주력군 3만여 명을 동원하여 팔로군의 태항산 근거지를 공격하였소. 이때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일본군의 소탕에 맞서 함께 대항하였소.
일본군에게 포위를 당한 팔로군의 탈출로를 뚫은 조선 청년이 있었소. 그의 이름이 윤세주요. 당신네 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 등소평의 목숨을 구해준 이가 윤세주임을 잊지 말길 바라오."
그리고 나는 독주 세 잔을 연거푸 마셨다. 장츠대학교 총장을 모시던 청년은 세 잔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내 앞에서 고꾸라졌다.
의열단의 지도자는 김원봉과 윤세주였다. 윤세주가 이육사의 스승이었다면, 김원봉은 정율성의 스승이었다. 정율성은 1933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였고, 졸업 후 김원봉의 명령에 따라 일본인 첩보활동에 종사하였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을 보면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본인 첩자 혐의를 쓰고 죽는 비운의 혁명가 김산이 나온다. 김산은 정율성의 매부 박건웅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고, 정율성은 여기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1937년 항일투쟁의 본거지 연안으로 들어갔다.
▲ 광주에 있는 '정율성 거리전시관' 입구에 서있는 정율성상. 이 흉상은 중국에서 만들어 그의 생가가 있는 광주로 왔다. |
ⓒ 이주빈 |
이육사는 시인으로, 정율성은 음악으로 항일투쟁에 종사한 점도 흥미롭다. 국내에 잠입하다 체포된 이육사는 감옥 생활 끝에 몸이 망가졌다. 더는 활동할 수가 없었다. 의열단의 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투쟁 대열에서 이탈할 것인가, 진로를 고뇌했다.
마침내 선생은 시를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작가의 길을 결심하였다. '청포도'를 썼고, '광야'를 발표하였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라며 호방한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연안 보탑산 위에 노을이 불타오르고
강변에는 달빛이 흐르네
봄바람은 들판으로 불어오는데
산과 산들이 철벽을 만들었네
아, 연안 장엄하고 위대한 도시여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아, 연안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은 케이팝(K-pop)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연일 방탄소년단(BTS)이 전 세계에서 올리는 성취를 입에 담기에 바쁘다. 20세기 한류의 대표는 정율성이었다. 또한 앞으로도 중국 인민이 있는 한 정율성의 연안송은 영원할 것이라고 본다.
1943년 1월 1일, 육사는 신석초와 함께 눈길을 걸었다. 답설을 하면서 육사는 조용히 속삭였다. "가까운 날에 난 북경으로 가려네." 선생은 왜 북경에 잠입했을까?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부음이 왔다. 동생 원창이 북경으로 달려갔으나 선생의 유해는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어 있었다.
해방은 되었으나 정율성은 고향에 올 수 없었다.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하신 분들의 공통된 운명이었다. 노후는 쓸쓸했다.
"조선인은 나를 중국 사람으로 여기고 중국인은 나를 조선사람으로 여긴다. 차라리 어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사냥이나 하면서 살고 싶다."
이육사가 북경에서 일본놈의 고문에 죽었듯이, 정율성도 북경에서 최후의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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