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등급 ‘A’ 기업도 이자 7% 낼 판…현금 마련 ‘초비상’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2023. 10. 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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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리 스트레스, 기업 대응은
고금리 ‘쓰나미’가 덮치면서 기업은 이미 초비상이다. 저금리 때는 레버리지를 지렛대 삼아 신사업 발굴에 적극 나서던 재계에서 최근 전반적인 경영 기조가 수익성 확보와 관리에 방점이 찍혔다. 신사업 발굴을 도맡던 조직은 후선 조직으로 위상이 대폭 축소되거나 조직 자체가 와해된 경우가 적지 않다. 금융비용이 치솟자 재무 구조 개선을 위해 유형자산을 처분하거나 이를 유동화하려는 시도도 목격된다. 채권 시장 돈가뭄이 심화하면서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기업은 단기 자금 시장을 노크하거나, 사모채권 시장을 찾고 있다.

미래 먹거리 조직 위상 축소

후선 조직으로 격하되기도

최근 재계에서는 고금리발 위기 대응을 위해 수시, 조기 인사를 단행하는 가운데 신사업 발굴을 위해 수년 전 적극 중용됐던 컨설턴트 출신 CEO와 임원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는 분위기다. 그들이 떠나 공석이 된 자리는 사업 관리형 임원이 채우고 있다.

최근 신세계그룹에서는 미래 먹거리 구상 특명으로 올 초 설립됐던 미래혁신추진단이 출범 1년도 안 돼 간판을 내렸다. 추진단을 이끌던 이길한 대표가 이번 인사에서 그룹을 떠나 조직 자체가 와해됐다.

그룹 전체가 실적 부진과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는 CJ그룹에서는 지난 7월 컨트롤타워인 지주사 CJ에 대한 조직 개편을 실시하면서 전략기획그룹을 없앴다. 당초 경영 대표 아래 사업관리그룹과 전략기획그룹 등 2개 그룹을 뒀으나 사업관리그룹만 남기고 나머지 조직은 대표 직속으로 배치했다. 베인앤드컴퍼니 출신으로 기존 전략기획실장이었던 이승화 부사장은 CJ제일제당 신약TF로 자리를 옮겼다. 새 전략기획실장으로는 재무 전문가 이한메 대한통운 경영지원실장(CFO, 부사장)이 기용됐다.

현대차에서는 액센츄어, 맥킨지 등을 거친 지영조 전 사장이 고문으로 밀려났다. 그는 현대차 전략기술본부를 이끌며 신사업 발굴 등 해외 투자를 진두지휘했으나 해당 본부는 사라졌고 새로운 조직으로 전환됐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직접적인 해외 투자보다 투자 대상 관리 또는 회수에 주력하고 있다.

SK그룹에서는 맥킨지 출신 유정준 부회장 입지가 위축됐다는 평가다. SK E&S는 수소, 에너지솔루션 등의 부문에서 그룹 미래 먹거리를 개척해온 계열사다. 유 부회장은 재무 구조 개선, 해외 사업 확대 등 굵직한 성과를 남겼으나 임기(2024년 3월)를 남겨두고 SK E&S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미국 자회사 패스키(PassKey)를 이끌어왔다. 유 부회장은 올 상반기 패스키 대표이사직도 내려놨다. 패스키는 최재원 수석부회장이 이사회 의장과 최고투자책임자(CIO)로 있다. 이 탓에 유 부회장 입지와 역할이 모호해졌다는 평가다.

금리 민감도가 높은 금융 업종에서도 신사업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보험연구원이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 CEO 42명을 대상으로 내년 사업 전략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전략에 대한 질문에 신사업을 추진하겠다는 CEO는 4.8%에 그쳤다.

돈 되는 것 다 팔고 유동화도

신세계그룹 이마트 등 리츠 검토

고금리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토지와 건물 등 유형자산을 처분해 현금을 확보하거나 이를 유동화하려는 상장사도 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0월부터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잔액은 11조4891억원에 달한다. 이런 가운데 올 7월부터 지난 9월까지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사 17곳이 모두 1조1428억원 규모 유형자산 처분, 양도 매각 계획을 공시했다. 올 상반기(1~6월) 1조1653억원과 맞먹는 규모다. 연말로 갈수록 유형자산 처분 등 관련 공시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기업의 선제적인 유동성 마련은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학습 효과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당시 시장 금리가 급등하면서 상당수 기업이 회사채 차환 등에 차질을 빚자 금융사로 랩, 신탁 등 환매 요청이 빗발쳤고 이 과정에서 채권 시장 불안이 확대되는 악순환이 빚어졌다. 올 4분기 ‘긴축 발작’이 재현될 조짐이 뚜렷해지자 자체 유동성 확보로 위기 대응 역량을 키우려 한다는 진단이다. 이미 한진칼은 8~9월에만 4000억원 넘는 자산 매각 계획을 공시했다. 시장에서는 한진칼이 올 하반기와 내년 3월 등 순차적으로 만기가 도래하는 회사채와 차입금을 갚기 위해 보유 자산을 매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9월 11일 241억원 규모 아모레퍼시픽 진천공장 용지를 동원F&B에 매각한다고 밝혔다. 이 또한 재무건전성 강화가 주된 목적이다. 쌍용씨앤이는 지난 7월 자회사인 쌍용레미콘에 임대한 2050억원 규모 토지를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쌍용씨앤이 측은 재무 구조 개선과 사업 구조 개편을 위한 자산 처분이라고 밝혔다. 일진디스플레이는 평택공장을 530억원에 매각한다.

신세계그룹은 자산 유동화를 추진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신세계그룹 부동산 개발 사업 계열사인 신세계프라퍼티는 리츠 설립을 추진 중이다. 대규모 투자로 차입 부담이 커진 가운데 본업 부진에 따른 현금흐름이 신통치 않자 유동화를 통한 자금 조달 카드를 꺼내든 것이라는 분석이다. 스타필드나 이마트 보유 부동산을 중심으로 리츠 자산을 꾸릴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돈가뭄 심화…붐비는 CP 시장

CB 등 사모채 발행 활발

채권 시장에서 ‘긴축 발작’이 심화하며 기업은 단기 유동성 마련을 위해 CP(기업어음) 시장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공모 회사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난항을 겪자 나타난 변화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기업은 신용등급조차 필요 없는 CB(전환사채) 등 사모채권 시장을 노크한다.

이런 경향은 유동성 압박에 시달리는 건설업계에서 두드러진다. 시장에선 건설사 줄도산을 우려하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다. 올 들어 범현대가의 HN Inc와 시공능력평가 100위권인 대창건설에 이어 시공능력평가 113위 신일까지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미 8월에만 롯데건설, 코오롱글로벌, 두산건설, 대우건설, 태영건설 등 5개 건설사가 CP 시장을 찾았다. 특히 코오롱글로벌은 전체 차입금 가운데 단기 차입금 비중이 50%를 웃돈다. 이는 전체 차입금 가운데 절반이 넘는 금액의 만기가 1년 안에 돌아온다는 의미다. 사정이 이렇자 코오롱글로벌은 8월 4일과 9일, 두 차례에 걸쳐 CP 발행액을 200억원으로 늘렸다. 코오롱글로벌은 올 3월 운영 자금 목적으로 3년 만기 구조 사모채 300억원도 발행했다. 채권 시장 관계자는 “회사채 수요 예측에 나섰다가 흥행 성적이 크게 부진할 경우 자칫 시장에서 더 큰 위기론이 확산할 수 있다”며 “CP 시장을 찾는 것에는 이런 우려를 차단하려는 목적도 작용했을 것”이라 진단했다.

대형 건설사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신용등급 ‘A’로 시공능력 최상위권인 대우건설조차도 7%대 금리로 자금 조달에 나서야 할 만큼 건설업계를 바라보는 자본 시장 시선은 싸늘하다. 대우건설은 올 3분기 잇달아 CP 발행에 나서 잔액이 1000억원을 웃돈다. 시장에서는 대우건설이 조만간 만기가 도래하는 1000억원대 회사채 상환을 위해 CP 발행을 크게 늘린 것으로 보고 있다. 해당 회사채 금리는 3.8%지만 최근 금리 급등으로 자본비용이 치솟자 회사채 차환을 포기하고 CP 발행을 택했다는 분석이다.

옵션부사채나 CB 등 사모채 시장을 노크하는 건설사도 늘고 있다. 특히 CB는 대부분 신용등급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재무 구조가 열악한 기업이 발행해왔다. 최근에는 대형, 중견 건설사도 CB 발행에 나설 만큼 긴박한 분위기다.

대형사 중에서는 대우건설이 지난 8~9월 450억원 규모 옵션부사채를 발행했다. 앞서 동부건설·태영건설·KCC건설·계룡건설산업 등 중소형 건설사도 연이어 옵션부사채를 발행했다. 동부건설도 지난 6월 이례적으로 CB 시장을 찾아 250억원 규모 자금을 조달했다. 지난해 말 신용등급 전망이 하향 조정돼 조달비용 급증이 우려되자 회사채 발행에 나설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0호 (2023.10.18~2023.10.2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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