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노조는 왜 실현 불가능한 '고용세습'을 고집할까 [기자수첩-산업IT]

박영국 2023. 10. 16. 10: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법적으로 적용 불가…노조도 '사문화' 인정하면서도 단협 개정 거부
지부장 선거 앞두고 단협 개정 지렛대로 '현대차보다 나은 조건' 도출 전략
여의도 정치판과 꼭 닮은 노조 정치판에 기업 경영 흔들려
기아 노사가 7월 6일 경기도 광명시 오토랜드 광명에서 2023 임금협상 상견례를 진행하고 있다. ⓒ기아

기아의 임금협상(임협)이 4개월째 공전하고 있다. 지난 7월 6일 노사 상견례를 겸한 1차 교섭을 시작으로 이달 12일까지 본교섭만 15차례 열렸으나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했다.

사측은 일찌감치 그룹 내 같은 완성차 계열사인 현대차와 동일한 임금성(임금 및 성과급)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더해 12일 교섭에서 주간 연속 2교대 포인트 인상(50만 포인트→100만 포인트), 유아 교육비 지원 확대(120만원→240만원), 잔업 해소 및 중식 연장을 추가로 내놨다.

또, 오토랜드 화성에 대형 PBV(프로젝트명 LW)를 생산하는 두 번째 목적기반모빌리티(PBV) 공장을 2028년 양산 목표로 신설해 조합원들의 고용 안정을 보장하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노조는 결렬을 선언하고 17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노조는 막판 교섭에서 현대차의 교섭결과와 다른 내용의 진일보된 조건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특히 정년연장은 최우선 요구안으로 내세웠다. 사측이 요구한 고용세습 조항 삭제는 거부하고 역으로 ‘개악(改惡)’ 시도라고 비난했다.

막판 쟁점으로 남은 것들은 사측의 노력 여부를 떠나 모두 현실적으로 수용 불가능한 것들이다. 현대차와 기아는 매년 동일한 임금성 조건으로 교섭을 타결해온 전례가 있는데, 이를 바꾸는 건 임금체계를 성과연동제로 뜯어고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교섭결과가 모든 조합원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현 임금체계에서 교섭을 길게 끌어온 기아가 현대차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타결한다면 현대차 노조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부정적 학습효과로 인해 앞으로 현대차그룹 내 모든 계열사들의 교섭이 더 힘들어질 것임은 물론이다.

반대로, 기아 노조 역시 자신들이 먼저 교섭을 타결했는데, 나중에 현대차가 더 많은 임금과 성과급을 받게 된다면 들고 일어날 것임을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기아의 실적이 더 좋다고 하지만, 현대차의 실적이 더 좋았을 때도 기아 노조는 현대차와 동일한 조건을 요구했었다.

정년연장은 더더욱 그렇다. 현대차 노조가 정부 정책이나 사회적 합의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시행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 미루기로 한 정년연장을 기아가 먼저 시행한다면 그룹 전체가 심각한 몸살을 앓아야 한다.

고용세습 조항 삭제 거부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문제의 조항인 기아 단협 27조 1항에는 ‘정년 퇴직자 및 장기 근속자(25년 이상)의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말 그대로 현대판 음서제다.

이미 ‘불법’ 임을 인증받기도 했다. 고용노동부는 이 조항이 균등한 취업 기회를 보장한 헌법과 고용정책기본법 위반이라며 시정을 요구했다가 이뤄지지 않자 지난 4월 민주노총 금속노조와 금속노조 위원장, 기아 및 기아 대표이사를 입건했다.

만일 이 조항대로 장기 근속자 자녀가 정식 채용 절차를 무시하고 기아에 채용된다면 당사자와 경영진, 회사까지 사회적 비난은 물론, 법적 처벌까지 감수해야 한다. 노조를 비호하는 진보 정치권도 고용세습까지 방어막을 쳐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조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노조는 고용세습 조항이 사실상 사문화된 것으로, 지난 10년간 해당 조항을 통해 채용된 사례는 단 한 것도 없다는 점을 개정 반대의 이유로 내세웠다.

2월 1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투쟁선포식에 참여한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기아 노조) 조합원들이 행진하고 있다.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

그렇다면 노조는 왜 이처럼 실현 불가능한 것들(현대차보다 나은 임금조건, 정년연장, 고용세습 조항 유지)을 고집하는 것일까.

답은 기아나 현대차, 현대중공업과 같이 노조 설립의 역사가 긴 대형 사업장에 구축된 ‘정치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노조는 내부적으로 바깥세상의 정치판과 동일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노조 지부장은 대통령이고 노조 집행부는 행정부다. 국회의원 개념의 대의원들도 있다. 심지어는 ‘정당’과 같은 조직도 있다. 현 집행부와 정치적 라이벌 관계인 ‘현장조직’ 들이다.

현장조직에서 내세운 주자가 조합원 선거에서 지부장으로 당선되면 집행부도 통째로 갈린다. 이른바 ‘정권교체’다. 애초에 선거 자체가 지부장과 부지부장들이 러닝메이트로 나와 선거를 치르는 구조다. 선거에서 승리한 현장조직은 부지부장과 사무국장 등 집행부 간부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여당’이 된다. 나머지 현장조직은 ‘야당’인 셈이다.

이처럼 중요한 선거가 올해 말 예정돼 있다. 2년짜리 지부장의 임기가 올해로 만료된다. 선거를 앞둔 집행부는 절박하다. 선거에서 패배하면 노조 전임자로서의 따뜻한 생활을 마치고 2년간 떠나 있던 생산라인으로 복귀해야 한다. 상급 단체인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으로 올라가고, 나아가 국회까지 진출할 기반이 될 커리어도 단절된다.

선거를 앞둔 노조 지부장과 집행부에게 사측과의 교섭 결과물은 당락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 요소다. 특히 사측과 도출한 잠정합의안이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부결될 경우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입는다.

이런 형편인지라, 노조 집행부로서는 설령 비현실적인 요구안이라도 계속해서 밀어 붙여야 한다. 합리적인 수준에서 합의를 수용했다가 조합원 찬반투표에서 부결되느니, 차라리 임기가 끝날 때까지 타결을 못하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하다.

기아 노조 집행부가 교섭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부장 선거에 현대차보다 나은 조건, 혹은 정년 연장을 성과물로 들고 나가거나, 그게 안 되면 판을 엎어야 한다. 고용세습 조항이 구시대의 악습이라는 점을 인지한다 한들, 확실한 반대급부 없이 내줬다간 다시 ‘현장 노동자’로 돌아가야 한다.

결국 기업 실적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교섭 결렬과 파업은 노조 내부의 정치적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정치판을 벌이더라도 자신들끼리 벌이면 될 일을 기업과 소비자, 주주, 나아가 국가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게 문제다. 기업이 노조 정치판에 휘둘리지 않도록 노동개혁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