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예술 거장들이 탄생한 피렌체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로마에서 다시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기차는 세 시간을 넘게 날려 피렌체에 도착했습니다.
숙소에 짐을 두고 잠시 시내를 걷다가, 금세 프렌체의 두오모를 만났습니다. 아주 거대한 건물인 만큼, 피렌체를 걷다 보면 골목 틈 사이로 두오모를 보게 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 피렌체의 두오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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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를 직접 보고 느낀 첫 번째 인상은, 생각보다 아주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오모가 피렌체의 랜드마크가 된 이유가 있었던 셈이죠. 비슷한 높이의 건물 사이에 높게 솟은 성당은 도시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 골목에서 보이는 두오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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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두오모의 돔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들 중에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큽니다. 철근 콘크리트를 동원한 더 거대한 돔은 만들어졌지만, 이렇게 벽돌을 쌓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것이죠. 교황이 거주하는 성 베드로 성당의 돔도 피렌체 두오모보다 규모가 작습니다.
피렌체에 이렇게 거대한 성당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당시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문화와 기술을 선도하는 도시였으니까요.
피렌체는 이미 12세기부터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거대 도시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 복속되었던 때도 있었지만, 오랜 기간 귀족과 길드가 지배하는 공화국이었죠. 피렌체는 제조업과 무역업을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 베키오 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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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치 가문은 15세기 피렌체의 사실상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을 배출할 정도로 번영했죠.
메디치 가문은 그렇게 축적한 부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예술가를 후원했습니다. 피렌체 두오모를 설계한 필리포 부르넬리스키 역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죠.
그뿐 아닙니다. 수많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거장 예술가들이 피렌체에서 탄생했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대표적입니다. 이외에도 조토, 마사초, 도나텔로, 보티첼리 등의 예술가가 피렌체에서 태어나 활동했습니다. 피렌체는 꼭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지 않더라도, 여러 예술가와 교류할 수 있는 이탈리아 예술의 허브로 성장했습니다.
꼭 미술 분야만이 아닙니다. <신곡>의 저자 단테 알리기에리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특히 단테는 지식인의 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서민들의 구어에 가까웠던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습니다.
단테의 작품이 출판되고 유통되면서 각 지방에서 사용되던 방언이 하나의 '이탈리아어'로 수렴되기 시작했다고도 하죠.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표준어는 피렌체가 속한 토스카나 지방의 방언을 근간으로 합니다. 단테가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 피렌체의 단테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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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접어들며 피렌체도, 메디치 가문도 점차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말 한 차례 피렌체 정치에서 축출되기도 했죠. 메디치 가문은 다시 돌아왔지만, 피렌체의 황금기는 이미 지나고 있었습니다.
16세기 유럽 대륙의 주도권은 알프스 이북으로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특히 카를 5세 시기 신성로마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죠. 카를 5세는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해 한때 로마까지 정복했습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의 역할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렌체의 산업도 쇠퇴하기 시작했죠. 결국 메디치 가문은 1737년, 잔 카스토네 데 메디치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가지고 있던 토스카나 대공의 자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가 가져가게 됩니다.
▲ 우피치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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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유산을 상속받은 안나 마리아 루시아 데 메디치는 1743년 사망했습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이 가지고 있던 예술품을 모두 피렌체 시에 기증하면서, 단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 예술품이 피렌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기증한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남아 있죠.
메디치 가문은 단절되고 피렌체의 번영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이 남긴 예술의 흔적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도시에 남았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하죠. 피렌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이제 단절되고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피렌체의 두오모는 지금의 여행자에게도 똑같은 경외감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정치보다 긴, 인생보다 긴 예술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겠죠. 피렌체의 두오모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화려했던 과거의 빛바랜 흔적만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를 타고 남아 여전히 같은 감동을 주는, 정치보다 긴 예술을 두오모의 돔은 상징하고 있는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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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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