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독립선언 준비하다 적발 당해
[김삼웅 기자]
▲ 묵암 이종일 선생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3.1혁명이 일제의 폭압으로 좌절되었으나 국내외에 미친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그 정신을 잇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4월 11일), 홍범도가 지휘한 대한독립군이 국경지대 갑산·혜산진의 일본 군영을 습격 (8월 7일), 노인동맹단 강우규가 남대문역에서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 일행에게 폭탄투척(9월 10일), 김원봉을 비롯한 13명이 만주 길림에서 조선의열단 결성(11월 10일), 만주지역 한족회의군정부가 무장단체 서로군정서로 개편(11월 12일), 간도국민회원 5명이 무기구입을 위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수송하던 15만원 탈취(1920년 1월 4일), 북간도 독립군 200여 명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입(3월 15일), 봉오동대첩(6월 4~7일), 의열단원 박재혁 부산경찰서에 폭탄투척(9월 14일), 청산리대첩(10월 21~26일), 의열단원 김익상 총독부 청사에 폭탄투척(1921년 9월 12일), 의열단원 김익상 상하이에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했으나 실패(1922년 3월 28일) 등 항일투쟁이 계속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중국에서 1919년 5월 4일 반일의 5.4운동, 인도에서는 1919년 4월 간디의 비폭력 반영운동을 비롯 라틴 아메리카 등 세계 각지의 반식민지 해방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1922년 1월 미국 등 9개 국의 태평양회의가 열렸으나 한국의 독립문제는 외면하였다.
이종일의 조국독립 의지는 확고했다. 투옥 전후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연방제도는 모르지만 식민지 통치에는 절대로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금후에도 조선을 독립하려는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큰 소리로 "물론이다. 시기가 성숙되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 나는 합방이 되면서부터 독립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여의치 못하므로 나는 동학운동에서 보여 주었던 민중운동을 이 시기에 재현해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의(3월 1일) 만세운동은 그같은 운동의 연속이며 독립구국운동의 구체적인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라고 대답하니 대단히 불쾌한 낯을 보였다.(1919년 3월 11일자)
다시 한번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하겠다. 감옥 밖을 나와 보아도 별로 다른 맛이 나지 않는다. 보성사는 장효근이 재건해 놓았고 인쇄활자도 상당히 회복 되었다.(1921년 12월 22일자)
그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3.1혁명으로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850명, 구속자 45,306명이었다. 아직도 전국의 감옥에는 많은 구속자가 고통을 겪고 있었다. '민족대표'라 지칭된 신분으로 풀려났다고 해서 할 일이 끝난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 <자주독립선언문> 원본 |
ⓒ 묵암 이종일 선생 기념사업회 |
자신이 낭독할 「자주독립선언문」(일명 임오자주독립선언문)을 한문으로 작성하였다. 한지 2장에 757자의 한문으로 작성된 선언문은 한글로 번역하여 보성사에서 김홍규에게 인쇄하도록 하였다.
자기들이 소각시켰던 보성사가 다시 업무를 시작하자 일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시에 나섰다. 2월 27일 한밤중에 인쇄를 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선언서는 압수되고 제2독립선언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주독립선언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자주독립선언문
존경하는 천도교인과 민중여러분!
우리 대한은 당당한 자주독립국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세계의 으뜸 국민임을 재차 선언합니다. 지난 기미년(己未年)의 독립만세운동은 우리의 전통적인 독립에의 의지를 만방에 천명한 것이고 국제정세의 순리에 병진하는 자유·정의·진리의 함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력적 압박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이 자주독립운동은 몹시 가슴아프게도 꺾이었습니다.
지난날 우리의 민족종교계 대표들은 자진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당당한 우리의 평화적이고 양심적인 행동으로 독립의 절규를 상징하는 일대 시위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대표를 갖은 곤욕과 무질서한 문초로 위협하였습니다만 우리는 결코 비굴하거나 투항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다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반도 3천리가 모두 감옥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이제부터가 더욱 의미가 있고 중요합니다. 뜻 맞는 동지끼리 다시 모여 기미년의 감격을 재현하기 위해 우리 천도교의 보성사 사원 일동은 재차 봉기하여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아! 우리 민중들은 차마 망해가는 성스러운 나라를 그냥 방치해 두렵니까? 좌절해서는 아니됩니다. 진실로 우리 나라 우리 집을 위해 한 두 사람의 지사가 없단 말입니까. 비참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운이 다해서 그렇습니까. 명이 다해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섬나라 사람은 섬으로 보내고 대한 사람은 대한을 지켜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압박과 질곡 속에 얽매어 있다 해도 우리는 틀림없이 광복하고 말 것이니 민중이여! 안심하고 경건하게 이번의 독립시위운동에 참가하십시오. 우리의 역사는 반만년의 빛나는 전통과 유서가 있는 것이고 근대적 충의와 도덕의 근원이 깊은 것일 뿐 아니라 종교와 문학이 융창하고 밝아서 그 패택(沛澤)이 일본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긍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국혼(國魂)이 건재하고 견고하면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이제 문득 국제정세를 살펴 보건대 시급히 도모하여 독립시위운동을 하지 않으면 자존영생(自存永生) 할 수 없으며 예의 항거하여 일본을 방축(放逐)하지 못하면 결코 발전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도 기미년 이후 무단적인 헌병경찰통치를 고쳐 유화정책을 쓰고 있으나 이는 고등경찰통치이므로 기만당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의 절대적인 주장은 오로지 독립이 있을 뿐입니다.
가슴에 아로 새겨두고 궐기해서 일본을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진로에는 오직 자주독립이 있을 뿐입니다. 사회주의 풍조를 불식하고 오직 민주적 민중국가 건설에 매진하고 일본의 감언이설에 기만당하는 간사하고 어리석음을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민중 각자는 짚자리에서 잠자고 창을 배게로 하며 또 끓는 물속이나 불속의 형세라도 흔쾌히 뛰어 들어 온누리가 자주독립되게 하여 일월(日月)이 다시 밝아지면 어찌 한나라에 대한 공로만으로 그치겠습니까. 진실로 후세에 이 말을 전하여 훌륭한 조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 비록 미국 워싱턴의 태평양회의에 건 독립에의 원대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갔다고 해도 우리의 독립 의지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앞날에는 영광과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어서 이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해 주시기를 간절히 비는 바입니다.
단기 4255년 3월 1일
천도교 보성사 사장 이종일 외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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