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죽어야 산다” [이진곤의 그건 아니지요]
김기현 대안 수습책 되기 어려워
비상대책기구 전환이 해법이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지난 11일의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다음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당은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진심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강서구민들의 선택을 받진 못했다. 그 결과를 존중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 성찰하며 더욱 분골쇄신하겠다.…이번 선거의 패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총선 승리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겠다. 상대적으로 우리 당이 약세인 지역과 수도권 등에서 국민들의 마음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맞춤형 대안을 마련하겠다.”
후보 내지 말아야 했을 보궐선거
표현이 과장되거나 진실성이 결여돼 보이면 호소력·설득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진심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지만 선거를 보는 인식부터 문제였다. 그 선거에 국민의힘은 후보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김태우 전 구청장이 유죄판결을 받은 바람에 실시된 보궐선거였다. 그 곳에 원인제공자인 김 전 구청장을 공천했다. 당사자와 지지자들이야 억울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곳 유권자나 국민의 생각은 다를 수가 있다.
귀책사유를 가진 정당이 그로 인한 보선에 후보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은 재작년 서울·부산시장 보선 과정에서 확인된 민심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비운 자리를 채우는 보선에 기어이 후보를 냈다. 이럴 경우엔 후보 공천을 하지 않는다고 당헌에 명시해놨으면서도 국민을 우롱한 것이다. 당연히 민주당 후보들은 떨어졌다.
국민의힘 처사는 더 고약했다. 후보까지도 귀책 당사자였다. 억울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사법부의 판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민이 그런 인상을 받기 십상이었다. 대통령은 김 전 구청장이 확정판결을 받은 지 3개월도 안 돼 특별사면·복권의 은전을 베풀었다. 그리고 김 전 구청장은 그 두 달 만에 자신이 물러난 자리를 되찾겠다고 출마했다. 경선을 한다고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이 있었을까?
대통령실의 의지를 당 지도부가 너무 잘 읽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책임은 당의 몫이다. 유권자를 존중했더라면 공천을 보다 무겁게 여겼어야 했다. 국민의힘 처사에는 ‘진심’도 ‘최선’도 없었다. ‘특단대책’이라면서 ‘약세지역에 대한 맞춤형 대안’을 제시했다. 그건 선거 전략의 상식이다. ‘특단’이라고 말하려면 국민의 ‘신선한 충격’을 이끌어낼 만한 것이어야 했다. ‘분골쇄신’은 너무 상투적이고 과장된 용어다. 그 표현에서 진정성을 느낄 사람은 흔치 않다.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하겠다면서 ‘임명직 당직자 전원 사퇴’가 고작이었다. 이철규 사무총장 등 8명이 14일 사퇴했고 김 대표는 이들의 뜻을 ‘존중’해서 ‘수용’한 것으로 지도부의 ‘분골쇄신’은 일단락된 분위기다. 김 대표 자신이 이끈 선거였다. 가장 큰 책임을 진 사람이 하위 책임자들의 사퇴의사를 존중해서 수용했다는 것인데 국민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윤재옥 원내대표의 인식은 그나마 좀 낫다.
“이번 선거는 전국 기초단체 중 한 곳에 불과하지만 국민 전체의 민심이라 여기고 그 뜻을 깊이 잘 헤아리겠다.”
김기현 대안 수습책 되기 어려워
그렇지만 굳이 ‘전국 기초단체 중 한 곳에 불과’라는 전제를 둔 점에서 김 대표의 인식이나 도긴개긴이다. 당 지도부 및 소속의원 전원이 나서서 치른 선거였다. 이겼으면 ‘국민적 선택’이라고 했을 것 아닌가. 대통령실 관계자가 했다는 말도 궁색하긴 마찬가지다. “험지에서 치러진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한곳의 결과를 총선, 대통령 심판론과 연결 짓는 것 자체가 너무 과열된 것”이라고 했다는 언론보도다. ‘별것 아닌 선거’였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국민의 배신감을 유발하기 딱 좋은 화법이라 하겠다.
당내에서 소수이지만 쓴 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초선 최재형 의원은 14일 페이스북에 “임명직 당직자 사퇴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 죽어야 산다”는 글을 올렸다.
“국민이 내린 사약을 영양제나 피로회복제로 생각해선 안 된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선거결과는 가장 분명한 국민의 목소리다. 강서구청장 선거 결과가 국민의 힘에 들려주는 목소리는 분명하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윤리의 모범을 보여주고 국회를 떠났던 윤희숙 전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김 대표의 수습책을 비판했다.
“임명직이 사퇴했지만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에는 역부족이다. 당정관계를 제대로 세우고 민심을 정확히 전달할 분을 찾아 당의 쇄신과 총선 준비를 맡겨야 한다.”
두 번 당 대표직을 맡았다가 두 번 다 중도 하차한 경험을 가진 홍준표 대구시장도 14일 페이스북을 통해 “패전의 책임은 장수가 지는 것”이라며 김 대표를 힐난했다.
“부하에게 책임을 묻고 꼬리 자르기 하는 짓은 장수가 해선 안 될 일이다. 그 지도부로서는 총선 치루기 어렵다고 국민이 탄핵 했는데 쇄신 대상이 쇄신의 주체가 될 자격이 있나?”
(홍 시장은 과거 자신의 경우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말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5선의 서병수 의원은 15일 페이스북에서 “집권당이 대통령실 눈치를 보기 전에 국민의 마음부터 살피고 전달하라는 뼈아픈 질책, 이게 이번 보궐선거에서 확인된 민심”이라고 지적했다.
비상대책기구 전환이 해법이다
“김 대표에게 묻는다. 정부가 민심과 엇나갈 때 야당보다 더 단호하게 바로잡겠다는 결기가 당신에게 있느냐. 그럴 각오가 없다면 물러나라. 집권당 대표란 자리는 당신이 감당하기에 버겁다.”
김 대표가 억울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의 자리라는 건 언제나 억울함으로 채워진다. 대통령실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야말로 자신의 책임이다. 당을 이끌 책임과 권한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대통령실의 위세에 눌렸다면 누구 탓을 하겠는가.
단지 기초자치단체 한 곳에서의 패배라고 얼버무려 넘기려는 순간 내년 총선의 패배가 예비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선거기류는 대단히 민감해서 그야말로 ‘나비효과’로 나타날 수가 있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고 하지 않던가(문외한이면서 흉내 내는 실례를 범한다). 백 척 장대 끝에 올랐다고 다 이룬 게 아니다.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국민의힘이 15일에야 긴급의총을 열었다. 대응이 굼뜨다. 절박함이 읽히지 않는다. “기초단체장 선거 1곳의 패배일 뿐이다. 그게 뭐 별것이라고…” 하며 서로 위로 격려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 대표 퇴진론, 비대위 혹은 혁신위 체제로의 전환론 등이 제기되기는 했던 모양이다. 너무 과한 대비란 없다. 더 이상 내디딜 데가 없는 곳에서 한 걸음 더 떼어놓을 때 대비태세는 제대로 갖춰진다.
완벽한 방공망이라던 아이언 돔과 세계 최고 정보기관이라던 모사드도 하마스의 기습 공격에 어이없이 뚫리고 말았다. 총선 대비는 아무리 철저히 해도 모자라게 되어 있다. 총선에 져서 무기력 정권으로 연명해 갈 것이라면, 그 후에 정권까지 내놓을 것이라면 자리다툼이나 하며 지내도 된다. 그게 아니라 총선에 이겨서 개혁다운 개혁을 해내고, 그 힘으로 정권을 이어갈 의지에 차 있다면 비상대책기구로의 전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혁신위든 비대위든 외부인사 위주로 구성하는 게 옳다. 비상한 결의를 당원과 국민들에게 충격적으로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 지도부가 도저히 당권을 내놓을 수 없다면 한시적으로 권한과 역할을 비상기구에 넘겨주는 방법도 있다. 총선이후에 환수하는 조건으로(꼭 그래야 하겠다면).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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