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시시각각] 김수철의 ‘팔만대장경’
‘작은 거인’ 김수철은 귀여운 펭귄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연미복 차림에 3000여 석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를 뒤뚱뒤뚱 가로질렀다. 독학으로 익힌 지휘법도 남달랐다. 두 팔을 위아래와 옆으로 부지런히 흔들고, 때론 발도 쾅쾅거렸다. 한데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가 뿜어낸 음악은 대극장을 꽉 채웠다. 비유컨대 이날 그는 음악이란 태평양을 유영하는 혹등고래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그 커다란 혹등고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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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첫선
‘대립과 불통’ 넘어선 웅장한 무대
정치는 곧 화음 “거짓말은 들킨다”
」
김수철은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지독한 애주·애연가였던 그가 술과 담배를 단박에 끊은 뜻이 웅숭깊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팔만대장경 기념 음악을 의뢰받았으나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전전반측하던 그는 해인사 대장경 수장고를 지키던 노스님의 한마디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신심으로 해야지, 신심으로….”
그날 이후 김수철의 삶이 180도 달라졌다. 하루 세 갑의 담배와 틈만 나면 찾던 소주잔을 버리고 매일 새벽 3시반부터 밤 10시까지 작곡에 매달렸다. 1998년 4월 그렇게 완성한 게 4악장짜리 ‘팔만대장경’이다. 국악과 양악이 만난, 즉 국악 가락을 현대화한 대작이다.
지난 11일 김수철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에서 ‘팔만대장경’ 1악장 서곡 ‘다가오는 먹구름’이 흘렀다. 평화롭던 무대에 갑자기 우레같은 타악기 소리가 몰아쳤다. 몽골 침입 직전, 800년 전 고려시대 상황이다. 부처의 원력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던 고려인, 불경이 전쟁을 막는 무기는 될 수 없겠지만 평화를 희구했던 그들의 마음은 영원히 남을 터다. 우크라이나에 이은 이스라엘 전쟁, 그리고 한반도에 드리운 검은 구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 자리는 한국 음악사의 또 다른 모멘텀으로 남을 것 같다. 국내 최초로 시도한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 김수철 자신이 15년간 벼르고 별렀던 ‘꿈의 무대’라는 점에서 그렇다. 기업 후원이 드물어 공연비 10억원 중 상당 부분을 사비로 충당한 것도 눈에 띈다. 또 두 차례 공연 중 한 차례는 소방관·경찰·환경미화원 등 우리 사회의 일꾼을 무료 초청했다. 그는 “그간 먹고살고, 음악하게 해 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김수철은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의 주제곡 ‘치키치키차카차카’도 직접 불렀다. ‘젊은 그대’ ‘못다 핀 꽃 한 송이’ 등 숱한 히트곡 중에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다. 어린이들에게 해 준 게 없다는 반성에서 만든 노래로, 초등 5학년 음악 교과서에도 실렸다. 어른들이 불러도 신나는데, 특히 노랫말이 와닿는다. ‘나쁜 짓을 하면은 (…) 우리에게 들키지. 밤에도 낮에도 느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다네.’ 밥 먹듯 거짓말하는 어른들이라면 속이 뜨끔해지겠다.
김수철이 ‘음악 45년’을 정리하며 고른 키워드도 안성맞춤이었다. 88 서울올림픽 주제곡 ‘도약’으로 문을 열었고, 2002 한·일 월드컵 주제곡 ‘소통’으로 중간을 채웠다. 해당 음악을 고른 배경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대립과 불통’ ‘아집과 독선’의 시대를 무너뜨리는 웅장한 사운드는 당분간 계속 귀에 맴돌 것 같다.
혼란한 정국 탓일까. 이날 선배 가수 양희은이 부른 ‘정신 차려’도 쏙 들어왔다. ‘말로만 그래놓고 또 또 또다시 그러면 어떡하니 (…) 무엇이 그리도 크길래 욕심이 자꾸 커져만 가나 (…) 자꾸 그럴수록 슬퍼져요 혼자 살아가야 하니까.’ 정치의 본령인 ‘화음’이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오늘이 더욱 애처로웠다.
김수철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는 “빌딩은 없지만 음악 빌딩은 많다”고 자부했다. 이어 “매년 100인조 공연을 하겠다” “‘팔만대장경’을 외국에 갖고 나가겠다” “청소년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돈이다. “하다 안 되면 할 수 없고요. 끝까지 해봐야죠. 하하하핫핫.” ‘님 찾아 꿈 찾아 나도야 간다’ 노래 그대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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