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주의 시선] 구속영장 기각의 무게

문병주 2023. 10. 16. 00: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문병주 논설위원

2006년 가을 어느 날, 휴대전화에 대검 중수부 인사의 번호가 떴다. 워낙 취재가 안 되던 터라 잔뜩 기대하고 찾아갔다. 말실수라도 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A4용지에 적어놓은 내용을 읽었다. 격한 용어는 없었지만 법원의 잇따른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성토였다. 기사화를 원하는 분위기였지만 구속영장 재청구 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판단에 영장 내용으로 갈음했다.

중수부는 2003년 진행됐던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와 관련한 비리 의혹을 수사하고 있었다. 중수부의 위상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이 과하지 않을 시기였다. 한데 2006년 가을, 법원은 중수부가 청구한 수사 대상자들에 대한 체포 및 구속영장을 줄줄이 기각했다. 유회원 전 론스타코리아 대표의 경우 11월 한 달 동안 네 번에 달했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포진한 수사팀은 이듬해 유 전 대표와 론스타 법인을 불구속기소했다.

중수부에 불명예스러운 추억을 남긴 이 사건은 지난해 다시 화제가 됐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제기한 6조원대 소송에서 한국 정부가 약 2800억원만 배상하면 된다는 결정이 나왔다. 불구속기소된 유 전 대표가 2011년 징역 3년, 론스타 법인이 250억원의 벌금형을 확정판결 받은 게 주효했다. 수사한 내용을 재판 과정에서 잘 증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난달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상 의원총회와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 모습.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 청구 기각으로 인해 여야의 의총 분위기가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시스


올가을, 하나의 구속영장 기각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24일간의 단식까지 하며 방어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주변인들은 대통령ㆍ법무장관ㆍ검찰의 반성을 요구했다. 다른 쪽은 '실질적 유죄'라고 해석했다. 이런 혼란은 1차적으로 영장판사의 장황한 기각 사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범죄의 중대성’과 같은 용어를 포함해 100자 이내로 짧게 해 오던 걸 유창훈 판사는 793자나 썼다. 굳이 각 사안을 유죄 또는 다툼의 여지로 나누고, ‘정당의 현직 대표로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인 점 등을 감안할 때’라는 설명까지 넣었다. 그래서 더욱 구속해야 한다는 비판의 길을 열어놨다.

「 이재명 영장 기각에 해석 각각
불구속재판 사건 유죄판결 많아
본재판에서 제대로 겨뤄 이겨야

비슷한 사례는 2019년 3월에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의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문건’과 관련해 수사받던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 사유다. 당시 박정길 서울동부지법 영장전담 판사는 ‘최순실 국정 농단이 부른 공공기관의 파행’ ‘최순실 일파’ 등을 거론하며 긴 이유를 댔다. 불구속기소된 김 전 장관은 직권남용 등 혐의가 인정돼 지난해 1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확정받았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하는 게 원칙이다. 검사 실적 평가에서도 구속을 얼마나 했느냐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검찰이 피의자를 구속하려는 건 수사와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측면이 크다. 달리 말하면 불구속 수사ㆍ재판에서는 보강수사와 공판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한동훈 장관은 11일 국정감사에서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거론했다. “다 영장이 기각됐었지만 실제로 중형을 받고 수감됐다”고 했다. 실제 수치도 있다. 법원행정처가 발간한 ‘2023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피고인이 불구속된 상태에서 진행된 1심 형사사건 20만 5133건 중에서 실형ㆍ집행유예 등 형이 선고된 경우가 17만 9952건(87.7%)에 달한다. 무죄판결은 6906건(3.4%)에 지나지 않는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은 이번 구속영장 기각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허위 사실을 발언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대장동 개발비리 및 성남FC후원금 사건으로 불구속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지난 12일 백현동 특혜 개발 의혹 관련 혐의로도 불구속기소됐다. 대북송금 의혹, 변호사비 대납 의혹, 위증 교사 의혹은 물론 경기지사 당시 배우자인 김혜경씨가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유용한 데 관여했다는 의혹까지 남아있어 재판이 몇 개가 될지 모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6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대장동·위례 개발사업 특혜와 성남FC 불법 후원 의혹 관련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배임·이해충돌방지법 위반 등 혐의 첫 공판을 마치고 청사를 나서고 있다. 뉴스1


구속영장 심사는 본 재판이 아니다. 엄밀히 따져 발부가 형사처벌도 아니다. 피의자에 대한 영장 발부나 기각을 유죄 혹은 무죄 선고받은 것처럼 해석하거나 행세하는 건 아전인수다. 혐의 입증에 자신 있다며 구속영장을 청구한 만큼 검찰은 재판에서 그 자신감을 증명해야 한다. 영장 기각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이 대표는 제대로 재판에 임해 무고함을 확인받으면 된다. 갖은 이유로 재판이 지연되고 있고 더욱 늘어질 테지만 언젠가 결론은 난다.

문병주 논설위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