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멈춤 없던 ‘연필 수행자’
“언젠가 내가 떠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떠날) 준비하는 게 즐겁다.”
몇 년 전부터 이렇게 되뇌었던 구순(九旬)의 화가는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에 그 길을 떠났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본명 박재홍) 화백이 14일 오전 타계했다. 92세. 박 화백은 2021년 3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다가올 때를) 행복하게 받아들이겠다”며 “하지만 현세에서 더 건강하게 그림을 그리다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최근까지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박 화백은 한국 현대 추상미술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56년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식민 잔재로 규정하고 반(反)국전 운동에 앞장서며 한국 미술계의 중심에 섰다. 1962년 이후 홍익대 미술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묘법(描法·Ecriture)’ 연작을 시작하며 독창적인 세계를 다져갔다. 그의 ‘묘법’은 아들의 서툰 글쓰기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묘법이란 캔버스에 유백색의 밑칠을 하고 채 마르기 전에 연필로 수없이 반복되는 선을 그어가는 기법을 말한다. 그는 묘법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한국적인 회화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시절, 내 작품을 하려면 나를 완전히 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캔버스가 내게 수신(修身), 수행(修行)을 위한 도구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단색화전’을 계기로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2016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어 ‘완판’ 기록을 냈다. 지난 6월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거장, 자신의 유산을 세상에 남기려 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후학 양성을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현해가는 면모도 보였다. 2019년 기지재단(이사장 박승호)을, 2022년 박서보장학재단(이사장 배순훈)을 설립했다. 기지재단은 박서보미술관과 기념관 건립 관련 일을 맡고, 장학재단은 올해부터 홍익대 미술대학 재학생을 선발해 지원한다. 다만 그는 고향인 경북 예천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 건립을 간절히 꿈꿨으나 여러 현실적인 제약으로 끝내 이루지 못했다. 대신 JW 메리어트 제주 부지에 그의 이름을 딴 전시관인 ‘박서보미술관’(가제)이 내년 완공을 목표로 건축 중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직접 준비했다. 2년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 내가 있을 자리(납골묘)를 준비했다. 좌우명으로 비문(碑文)도 준비했다”고 했다. 비문은 이렇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그런데 잘못 변화해도 추락한다.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변화는 오히려 작가의 생명을 단축한다. 그걸 경계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명숙 씨와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17일 오전 7시.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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