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배교했던 정약전, 유배지에선 천주님께 기도 드렸다"
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 <기자말>
[황호택]
우이도에 있는 진리 선창은 우리나라 옛 선창 가운데 가장 오래된 포구 시설이다. 1745년(영조 21년)에 세운 중건비(重建碑)가 남아 있어 18세기 이전에 만든 시설임을 알 수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해양문화유산조사보고서 05(우이도)에서 진리 선창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해운 관련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했다. 중수(重修) 연대가 정확하게 남아 있고 지금까지도 섬 주민들이 활용하고 있는 선창이라서 더욱 의미가 있다.
▲ 조선 영조 때 문순득의 증조부가 화주(化主)가 돼서 중수한 진리선창. |
ⓒ 신안군 |
중건사업에는 문일장(文日章) 최두산(崔斗山) 등 4명이 화주(化主)를 했고 주민 21명이 시주했다. 석공과 대장쟁이 야공(冶工)까지 이름이 모두 중건비에 남아 있다. 중건비는 비문이 마모돼 육안으로 판독이 어려웠으나 문채옥(文彩玉) 씨가 필사해놓은 것을 그대로 옮겨 새 기념비를 세웠다.
조선 最古의 해양문화유산 진리 선창
▲ 미사포를 쓴 열녀비의 모습은 우이도에서만 볼 수 있다. |
ⓒ 신안군 |
우이도는 작은 섬이지만 산림이 울창하여 좋은 선재목(船材木)이 많이 났다. 선창 안에 인근 야산에서 베어온 굵은 소나무를 쌓아놓고 배를 건조했다.
선창에서 마을로 가는 길에 조기간장이 있다. 우이도 사람들은 밑 구덩이를 3m가량 파낸 저장고에 염장(鹽藏) 조기를 저장했다가 추석 대목 때 목포 영산포 등지에 내다 팔았다. 조기간장은 최근에 새 건물을 지어 복원을 마쳤다.
▲ 진리 마을의 어부 돌담길. |
ⓒ 신안군 |
진리 마을은 돌담길이 아름답다. 바닷바람을 막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조형미가 있다. 어부돌담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 정약전 동상.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흑산도와 함께 우이도에서 연구한 내용도 담고 있다. |
ⓒ 황호택 |
문순득 생가, 우이선창, 정약전 유배지, 표해시말, 진리성재 등 우이도는 살아 있는 박물관이다. 우이도에는 옛날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돈목항에서 100여m 떨어진 구릉에서 패총이 발견됐다.
▲ 정약전이 귀양살이하던 집터에 참깨와 들깨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
ⓒ 황호택 |
가족과 다산 생각나면 굴봉 올랐다
▲ 굴봉에서 내려다본 띠밭너머 해변. 썰물 때면 풍성사구까지 연결된다.정약전은 띠밭너머 해변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
ⓒ 신안군 |
적거지 바로 앞에 굴봉(窟峯)이 있다. 굴이 많아서 굴봉이다. 손암은 가족과 다산이 보고 싶으면 굴봉에 올라가 띠밭너머 해변과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를 드렸다. 손암이 살기 위해 배교(背敎)하고 목숨을 건져 유배 왔지만 그때까지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된다. 처벌이 두려워 잠복했던 신앙이 생을 얼마 안 남겨 두고 되살아났을 수도 있다.
진리1구 이장 문종옥은 "손암이 굴봉에서 기도드린 이야기는 아버지한테서 들었다"며 "동네에서도 이 이야기가 여러 집안에 전해 내려온다"라고 말했다. 손암이 쓴 <표해시말>이나 <송정사의>가 문채옥 씨 집 다락에 보관돼 있다 발굴됐다. 손암과 인연이 깊은 문씨 후손들의 이야기인지라 믿음이 더 간다.
천주교에서는 흑산도 우이도에서 정약전이 남긴 신앙의 흔적을 입증할 수 있는 문서나 성가집을 찾고 있지만 천주교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유배 온 손암이 그런 신앙 고백을 문서로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굴봉에서 마재의 가족과 강진에 있는 동생을 재회할 날을 기다리며 기도를 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다. 가톨릭으로서는 반가운 뉴스가 될 것이다.
▲ 선박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무속신앙의 유물인 우이도 진리 성재. |
ⓒ 황호택 |
우이도에서는 띠밭너머 해변으로 가는 고개를 성재라고 한다. 우실 너머 해안가의 절경과 먼바다 위로 떨어지는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다. 워낙 바람이 세게 불어 한여름에도 더위를 식힐 수 있다.
진리 성재는 방석 같은 바윗돌로 만든 돌담 우실이다. 우실은 보통 외풍을 막고 왜구 등 외적으로부터 마을을 가리기 위해 만든 숲을 말한다. 돌로 만든 진리 우실은 무속신앙의 유물이다. 문종옥 이장은 바다에서 불어와 고개를 넘어 당집으로 불어오는 살(煞)바람을 막아준다고 선대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민속(民俗)에서 살은 사람을 해치거나 물건을 깨뜨리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이다. 약 250년 전 입도조(入島祖)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당집 뒤에도 주봉인 비녀봉과 연결된 돌담이 쌓여 있는데 이 돌담이 성재와 마주보고 있다.
'성재'라는 이름은 돌담이 성벽 형태여서 생긴 이름 같다. 신안의 우실 가운데서 가장 특이하고 아름답다. 돌담이 허물어지고 많이 흩어져 지금은 30m 정도만 남아 있다. 두 개의 돌담이 교차하는 형태. 바깥 담의 길이는 14m, 안담은 26m, 높이는 1.7m. 풍성사구 뒤쪽으로 물이 빠지면 성촌 해변을 통해 이곳까지 걸어올 수 있다. 이곳을 통해 진리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성재 담을 통과해야 액막이를 한다.
진리에서 가파른 고개를 두 개 넘어가면 돼지머리처럼 생겼다는 돈목리가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장 큰 사구(沙丘)가 있는 곳이다. 파도에 밀려 모래가 해변에 쌓이고 다시 바람(계절풍)에 날려 만들어진 언덕이다. 돈목해수욕장의 북쪽 끝 산자락에 자리한 사구는 수직고도 50m, 경사면 길이 100m, 경사도 32~33도. 까마득한 600만 년 전에 형성됐다.
풍성사구와 해수욕장에는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몰려온다. 여름철에는 예약을 안 하면 돈목리에서 방을 구하기 어렵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모래언덕인 풍성사구. 왼쪽으로 돈목 해변을 따라가면 멀리 돈목 마을이 보인다. |
ⓒ 신안군 |
가파른 산길에서 무더위에 숨이 턱탁 막혀 죽을 고생이었다. 한화갑 전 의원이 돈목에서 진리로 학교를 다닌 길이라고 했다. 지금도 차가 다니지 않아 돈목과 우이를 오갈 때 주민들은 험한 산길을 피해 배를 주로 이용한다.
오는 길에 진리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길에는 '우이가인'(牛耳佳人)이라는 작은 비석이 놓인 돌무더기가 있다. 마중 나온 문종옥 이장은 오며 가며 그 앞에서 합장을 한다. 영아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은 아이들의 합장묘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의 보고서에는 박영월 할머니(2009년 당시 88세)가 "자식 열을 낳았는디 5남매는 땅에 묻고 3남2녀를 키웠다"고 말하는 개인 생애사 인터뷰가 들어 있다.
우이도에는 아름답고 흐뭇한 미담도 많지만 짠한 이야기가 가슴을 울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술총서 제16집 전통한선과 어로민속조사보고서 5 우이도, 2009 이덕일, 《정약전과 그의 형제들》, 다산초당, 2021 이태원, 《현산어보를 찾아서 4》, 청어람미디어, 2018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통령이 찾아가 가짜뉴스 척결 독려한 단체의 실체
- "너는 어느 쪽인가" 문재인·윤석열 정부는 왜 다른 판단 했나
- '보수 대변자'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의 우려스러운 판결들
- 시효 이틀 남기고... 공수처, '김학의 봐주기' 의혹 검사들 불기소
- 이준석 "창당하면 가장 어려운 역할할 것... 그게 대구 공략"
- 악재 쌓인 국제행사... 청와대 수석이 "기도하겠다"고 한 이유
- "화학물질 유출돼 대피했더니 정직 3개월"... 대법 판단은?
- '윤핵관' 쳐낸 자리에 '찐핵관' 온다
- 내가 받은 택배에 굵은 매직으로 주소가 다시 쓰여 있다면?
- 직무유기 고발에도 당당한 김용원 "위원장이 인권위 병들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