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고추 지나간 자리에 탄산... 아프니까 맛있구나

임승수 2023. 10. 15.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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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음식을 만나는 순간] 소곱창에 잘 어울리는 샴페인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임승수 기자]

아내가 지인으로부터 비타민 영양제를 선물 받았다. 나는 평소에 끼니만 잘 챙겨 먹으면 된다는 주의라 먹어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는데, 영양제를 선물한 분의 얘기인즉슨 특히 비타민D는 햇볕(자외선)을 잘 쐬어야만 체내에서 합성될 수 있단다. 현대인의 생활 습관상 야외활동이 적어 비타민D가 부족하니 영양제로 보충하는 것도 건강 관리를 위해 좋은 선택지라는 것이다.

작가라서 야외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솔깃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었다. 두 딸은 등하교하면서 뻔질나게 자외선을 쬐니 걱정이 없지만, 그렇게 아이들 학교 보내 놓고서는 글 쓰느라 집구석에 처박혀 식재료와 음식까지 모조리 배달로 받고 있지 않은가. 나야말로 비타민D 보충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 아닐까. 이런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선물 받은 비타민 영양제를 단 한 알 권해주는 일 없이 홀랑 먹어버렸다.

역시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 이 자명한 교훈을 되새기며 6개월마다 돌아오는 치아 정기검진을 위해 치과로 향하고 있었다. 간만의 외출이다 보니 그동안 부족했을 비타민D 합성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치과가 그다지 멀지는 않지만 걸음 속도를 절반으로 늦추면 두 배의 햇볕을 받아들이지 않겠냐는 계산으로 유유자적 걷고 있었다.

방에서 글만 쓰느라 계절의 변화를 미처 몰랐구나. 무심코 주워 입은 반팔티셔츠가 후회스러울 정도로 쌀쌀한 공기가 맨팔과 목 주위를 휘감는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안단테로 느긋하던 발걸음이 알레그로로 템포가 올라간다. 이러면 곤란한데, 비타민D를 합성해야 하는데.

정신을 가다듬고 애써 안단테로 템포를 낮추지만 그럴수록 싸늘한 공기와의 접촉시간이 늘어난다. 인생이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구나. 비타민D를 얻자니 추위를 감수해야 하고, 추위를 피하자니 비타민D가 부족해지고. 그렇게 안단테와 알레그로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어느덧 치과에 도착했다.

검진 및 스케일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한층 쌀쌀했다. 반년 묵은 치석이 제거되어 치아 사이로까지 싸늘한 공기가 침투하니 한기를 참아내기 어렵구나. 불현듯 특정 음식이 떠올랐다. 단 한 점만으로도 벽난로의 온기를 느끼게 하는 음식.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급의 졸깃함과 고소함으로 감동을 선사하는 음식. 바로 소곱창 말이다. 이 모든 게 결국 소곱창을 먹게 하는 빌드업이었단 말인가.

소곱창은 무조건 샴페인
 
▲ 도츠 브뤼 클래식 종종 할인가 5만 원대로 구입할 기회가 있어서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다.
ⓒ 임승수
 
집에 들어가자마자 배달앱으로 소곱창집을 검색해 곱창, 대창, 막창을 골고루 섞어주는 1.5인분 메뉴를 주문했다. 고기에는 술이 빠질 수 없는 노릇. 소곱창에 곁들일 와인이라면 다른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무조건 샴페인! 마침 할인할 때 사 놓은 '도츠 브뤼 클래식'이 셀러에 조신하게 누워 있다.

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스파클링 와인을 뜻하는 샴페인은 와인 중에서도 제법 가격대가 있는 데다가 최근 가격이 오르는 분위기지만, '도츠 브뤼 클래식'은 종종 5만 원대로 구입할 기회가 있어서 참으로 고마운 녀석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샴페인 제조에는 샤르도네,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르 이렇게 세 품종이 주로 사용된다. 이 샴페인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제조사 홈페이지를 방문하니 '도츠 브뤼 클래식' 제품 설명이 나온다.

세 품종의 조화로운 블렌드로 인한 뛰어난 밸런스가 돋보인다며 '황금빛 색조 속에서 우아한 기포가 격조 높은 발레를 선보인다'고 자화자찬이다. 아무렴! 역시 와인은 호들갑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술이구나. 마시는 사람뿐만 아니라 만든 사람조차 이렇게 호들갑이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다 치고, 소곱창을 먹는데 왜 하고 많은 와인 중에 샴페인이냐고? 그것은 곧 이어질 먹방 묘사를 읽어보면 수긍하리라 생각한다. 이내 벨이 울리고 음식이 도착했다. 포장 용기에 덮인 투명한 비닐은 곱창에서 피어오르는 뜨끈한 수증기로 뿌옇다. 비닐을 잘라내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곱창 온기가 가위 든 손에 노골적으로 전해진다.

문득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떠오른다.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가지고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장을 차례차례로 끌어내는'이라는 구절 말이다. 냉혈 동물이라 더운 김이 날 수가 없지만 문학적 표현을 위해 일부러 그렇게 썼다고 하던데, 같은 작가로서 염상섭이 모르고 썼다는 쪽에 곱창 두 점 건다.

눅진한 곱이 가득 찬 곱창부터 집어 들었다. 팥앙금 없는 호빵은 호빵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콜라겐 안쪽 고소한 곱은 곱창을 곱창이게 만드는 본질적 요소다. 씹으면 씹을수록 동물성 온기를 띤 졸깃함과 고소함이 강렬한 콜라보로 펼쳐지는데 그야말로 압권이다. 저체온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곱창 한두 점이라면 즉시 회복되지 않을까.

이번에는 대창 차례다. 크고 둥그런 외모의 그 녀석을 골라내 맛보았다. 풍부하고 두터운 대장 지방 덕분인지 치아가 미끄러질 듯한 독특한 식감이 흥미롭다. 그래서인지 곱창보다 대창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렇게 곱창과 대창을 각 한 점씩 섭취하면 그 강렬한 고소함과 미끄덩한 지방에 정신이 어질어질 혼미해지고 약간은 부담스러운 느끼함이 올라온다. 바로 이 순간 등장하는 해결사가 샴페인이다.

우선 샴페인을 잔에 따른 후 코로 가져가 향을 탐닉한다. 은은하게 깔린 이스트 향 너머로 사과 향, 배 향, 꽃 향 등이 차분하게 피어오른다. 향기를 음미하는 코끝에 분무기로 미세 물방울을 뿌리는 듯한 시원함이 감지된다. 발레리나의 우아한 도약처럼 끊임없이 솟구치는 기포 때문이다. 이것 참 앙증맞구먼.

샴페인 한 모금이 힘찬 그랑 주떼처럼 잔과 구강 사이의 공간을 훌쩍 건너뛰어 입안에 안착한다. 경쾌하고 신선한 탄산이 작렬하는 가운데 과실 향과 이스트 향을 머금은 우아한 신맛이 단 0.3초 만에 어질어질한 느끼함을 말끔히 정리한다.

기량이 최고조에 이른 발레리나가 혼신의 독무로 무대 분위기를 단번에 휘어잡는 것에 비견할 만하다. 이정도의 상큼함이라면 바로 곱창 스무 개 연속 먹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미식이란 '순간의 미학'
 
▲ 소곱창과 김부각을 거느린 샴페인 지금 이 순간 만끽한 황홀한 한 끼 식사가 당분간 지속될 거칠고 남루한 초근목피를 견디게 하는 건 아닐까.
ⓒ 임승수
 
구강 내부가 정돈되었으니 다시 한 점을 집는다. 이번에는 고소하고 담백한 막창이다. 소의 네 번째 위에 해당하는 부위인데 지방이 거의 없어 앞서 섭취한 대창과 확연히 구별되는 식감을 선사한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와 곱창을 흡입할 순서다. 아참! 청양고추 조각이 둥둥 떠다니는 양념장이 함께 배달됐던데, 푹 찍어 먹어야지.

어디선가 청양고추가 샴페인의 풍미를 덮을 거라며 우려하는 시선이 감지되는구나. 아서라! 돔 페리뇽, 크룩, 자크 셀로스를 영접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샴페인 눈치를 볼 필요가 있겠는가. 저 먼 프랑스 출신이라지만 한국에 왔으면 네가 청양고추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니.

톡 쏘듯 매운 청양고추가 지나간 자리를 샴페인의 탄산이 재차 쏘아주니 DNA에 잠재된 피학적 본능이 깨어난다. 아프니까 맛있구나. 원래 매력적인 매운맛의 근원은 통각이지 않은가.

그렇게 세상 근심 다 잊고 눈앞의 음식과 술에만 집중하니 곱창, 대창, 막창이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샴페인이 약간 남았는데 어떡하지? 이 순간을 대비해 김부각을 준비했다. 웬 뜬금없는 김부각이냐고?

국내 최고층 건물인 시그니엘의 79층에 있는 모 호텔 라운지에서 샴페인 안주로 김부각이 제공된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있는가. 특유의 바삭한 질감이 샴페인의 탄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김부각에 밴 고소한 기름 내음이 곱창과 샴페인 조합을 또 다른 형식으로 재현하는 듯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비우니 근사한 음식과 술을 동시에 영접했을 때만 체험할 수 있는 안락하고 기분 좋은 졸음이 쏟아진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이불을 덮고 누웠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 다녀오는 며칠의 여행이 이후 몇 달간 이어질 고단한 나날을 버티게 해 주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 만끽한 황홀한 한 끼 식사가 당분간 지속될 거칠고 남루한 초근목피를 견디게 하는 건 아닐까.

미식이란 그야말로 '순간의 미학'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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