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육필 원고 볼 수 있다…영인문학관서 만나는 문인들의 삶
"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한 구절이다. 백석은 "세상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고 썼다가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고 고쳤다. 세상에 몇 점 남아있지 않은 백석의 육필 원고가 이를 보여준다.
고(故) 이어령 선생과 부인 강인숙 여사가 설립한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이 작가들의 애장품과 육필 원고 등 9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를 연다. 11일 찾은 영인문학관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백석의 육필 원고였다. 평안북도 출신인 백석 시인은 분단 후 계속 북에 머물렀기 때문에 육필 원고가 매우 귀하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육필 원고는 작가의 성품뿐 아니라 작품의 수정 과정을 그대로 담은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오는 31일까지 서울 종로구 영인문학관에서 열리는 '문인들의 일상 탐색 2023' 전시다. 백석 시인(1912∼1996)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소설가 황순원(1915∼2000)의 장편소설 『움직이는 성』 초고 원본, 소설가 김훈이 사용했던 몽당연필, 이어령 선생의 육필 노트 등을 볼 수 있다. 이어령과 강인숙의 1958년 결혼식 당시 조병화 시인이 읊어준 시 '축혼가'의 육필 원고도 있다.
고(故) 박완서 선생(1931∼2011)의 애장품이었던 바가지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아들과 딸을 차별하던 시절 박 작가의 시어머니는 첫 아이로 딸을 낳은 며느리를 위해 '해산 바가지'를 마련했고 이 바가지로 쌀을 씻고 미역을 불려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줬다. 이 바가지는 박 작가의 단편 소설 '해산 바가지'의 소재가 됐다. 소설 속에서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려던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준 해산 바가지를 보고 모든 생명을 중히 여기던 시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시어머니를 요양원이 아닌 집에서 모시기로 결심한다.
박완서 선생 생전에 직접 연락해 바가지를 받아왔다는 강 관장은 "박완서 선생님의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출산할 때마다 아들딸 구분 없이 새 해산 바가지로 밥을 차려주셨다고 한다"며 "여기에서 생명 존중 사상이 담긴 단편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어령 선생이 마지막까지 집필에 몰두했던 서재도 볼 수 있다. 강 관장이 지난 1월 낸 산문집 『글로 지은 집』에서 "세상에 나서 가장 기뻤던 때는 그에게 서재를 만들어주던 때"라고 썼던 각별한 공간이다. 영인문학관은 '문인들의 일상 탐색 2023' 전시 기간 화·목요일 오후 2시 사전 예약자를 대상으로 문학관 2층에 있는 고인의 서재를 공개한다. 강 관장은 "선생님은 늘 새것을 좋아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했다"며 "집필실 책상에 놓인 7대의 컴퓨터가 이를 말해준다"고 했다. 그중에는 애플의 맥(Mac) 데스크톱도 있었다. '언어의 힘'을 강조했던 그의 사상에 걸맞게 책꽂이 하나를 전부 사전으로 채운 점도 인상적이다.
강 관장은 "기념관을 만드는 대신 서재만 공개하기로 생전에 선생님과 이야기를 했다"며 "선생님은 이 공간을 찾는 분들이 자신만의 서재를 어떻게 꾸밀지 상상해보는 시간을 갖길 원하셨다"고 했다. 암 투병을 하던 이어령 선생은 지난해 2월 26일 집필실에 놓인 병원용 간이침대에서 임종을 맞았다.
문학강연도 열린다. 21일 이어령 선생의 경기고 재직시절 제자인 불문학자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가 '문학과 공간'을 주제로 강연한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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