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서 비는 내리고... 한국미술의 기원, 빗살무늬토기

김찬곤 2023. 10. 1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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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모든 지역에서 나와... 만물의 기원 알아낸 세계 신석기인

[김찬곤 기자]

 
 도1.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높이 25.9cm. 국립중앙박물관. 도2. 서울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높이 20.8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빗살무늬토기의 비밀》(김찬곤, 뒤란, 2021)
ⓒ 국립중앙박물관, 김찬곤
 
빗살무늬토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이 그릇을 학교 역사 수업에서 수없이 듣고 배웠다. 하지만 이 그릇에 새긴 패턴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는 우리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 또한 마찬가지다. 학자들은 이 패턴을 그저 기하학적 추상무늬라고만 할 뿐이다. 학자들은 패턴이 점과 선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추상무늬 앞에 '기하학적'이란 말을 붙인다.

그런데 구상무늬 또한 점과 선으로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패턴을 '기하학적 구상무늬'라 하지 않는다. 사실 '기하학적 추상무늬'란 말은 '나는 모른다(I don't know)'는 말이다. 학자들은 고대 미술 패턴을 설명할 때 '추상무늬'란 말을 자주 한다. 이 말 또한 그 패턴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학자들은 본래 알지 못한다는 말을 웬만해서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애매하게 '추상무늬'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뭔가 찜찜해, 사실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 앞에 '기하학적'이란 말을 붙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패턴은 '기하학'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반도 신석기 시대는 보통 기원전 1만 년부터 1천 년까지, 약 9천 년으로 잡고 있다. 학자들 말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우리 한반도 신석기인들은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신석기인들이 자그마치 9천 년 동안 왜 '추상미술'을 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또 구석기 시대에는 구상미술을 하다가 신석기에 이르러 왜 갑자기 추상미술을 하게 됐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속 시원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세계 신석기 미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잘 아는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 1909∼2001)는 <서양미술사 Story of Art>(1950)에서 신석기 미술을 아예 다루지도 않고, 구석기 미술에서 바로 이집트 미술로 넘어간다.

그에게는 신석기 미술이 '공백'인 것이다. 그에 견주어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78)는 <예술의 사회사 The Social History of Art>(1951)에서 15쪽에 걸쳐 신석기 미술을 그런대로 알뜰히 다룬다. 하지만 그 또한 신석기 패턴과 디자인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신석기 미술을 '기하학적 형식주의'라 한 것이다. 점과 선으로 되어 있어 '기하학적'이라 하고, 그 패턴과 디자인이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이어졌기에 '형식주의'라 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기하학적 추상무늬'란 말은 바로 그에게서 온 말이다.

후지다 료사쿠가 이름 붙인 기하학적 추상무늬  
 
 도3 빗살무늬토기. 서울 암사동. 높이 36.8cm. 국립중앙박물관. Y축에서 바라본 천문(天門). 도4 육서통 기(?) 자. X축에서 본 천문(天門)과 구름. 그림:《빗살무늬토기의 비밀》(김찬곤, 뒤란, 2021)
ⓒ 김찬곤
 
한반도 빗살무늬토기는 1916년 평안남도 용강용반리유적에서 그릇 조각 몇 점이 처음 나왔고, 그 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쏟아져 나왔다. 빗살무늬토기는 1916년 용강용반리유적을 기점으로 하면 107년째 되어 가고, 서울 암사동을 기점으로 하면 98년째 되어간다. 하지만 근대사학 100년 동안 한반도 빗살무늬토기는 그때도 '기하학적 추상무늬'였고, 지금도 여전히 기하학적 추상무늬이다. 이 그릇에 맨 처음 이름을 붙인 이는 일본 사학자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다.

후지다 료사쿠는 1930년 암사동 빗살무늬토기를 연구할 때 핀란드 고고학자 아일리오의 책을 참고했는데, 그가 이 토기를 일러 독일어로 '캄 케라믹(kamm keramik, 빗 질그릇)'이라 한 것을 '즐목문(櫛目文 빗즐·눈목·무늬문)토기'로 옮긴 것이다. 여기서 '櫛目(しめくし目)'은 머리를 빗었을 때 '머리카락에 남는 자국'을 말한다. 그 뒤 우리 학계에서 이 즐목문토기를 '즐문토기' '빗살무늬토기'로 옮겨 지금까지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빗살무늬토기'는 1960년 북한 사학자 도유호가 가장 먼저 쓴 말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빗살무늬토기' 하면 보통 빗 같은 무늬새기개로 무늬를 새겼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빗살무늬토기는 없다.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빗살무늬토기 이미지 자료 6,699점과 발굴조사 보고서를 살펴봤는데 빗 같은 무늬새기개로 새긴 그릇은 단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간혹 그릇 조각을 깨뜨려 그 깨뜨린 면에 생긴 이로 그릇 몸통 빗줄기(雨) 패턴을 새긴 것은 있었다. 하지만 그 수는 30점도 되지 않는다.

빗살무늬토기는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까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온다. 대체로 세계 신석기인들은 그릇 표면에 구름(삼각형 구름과 반원형 구름)과 비를 새겼다(도1,2 참조).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 구름·비 패턴과 농사하고는 별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 한반도 또한 신석기의 시작과 농사의 시작은 일치하지 않는다. 아주 원시적인 농사의 흔적도 기원전 4천 년 전쯤으로 잡고 있다. 이도 최대로 내려잡았을 때다. 하지만 그릇은 그보다 훨씬 이전 기원전 8500년부터 빚어 썼다. 그러니까 그릇과 농사의 시작은 꼭 같지 않다는 점이다.

한반도 신석기인을 비롯하여 세계 신석기인은 그릇에 자신의 세계관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세상 만물의 기원 물(水), 이 물의 기원 비(雨), 이 비의 기원 구름(云)을 새겼는데, 한반도 암사동 신석기인은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바로 구름의 기원 '하늘 속 물'과 이 하늘 속 물이 나오는 통로(구멍) '천문(天門)'까지 새긴 것이다(도3,4 참조). 이 세계관은 '기원의 기원'까지 담았다는 점에서 당시 세계 신석기 세계관 가운데서도 가장 앞서 있는 세계관이다.
 
 도5 옹관. 경남 진주시 대평면 상촌리유적. 높이 35cm. 동아대학교박물관. 도6 그릇받침. 가야 5세기. 경남 김해시. 높이 27.8cm. 국립김해박물관. 도7 조선 민화 책가도 부분. 일본민예관. 그림:《빗살무늬토기의 비밀》(김찬곤, 뒤란, 2021)
ⓒ 동아대학교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일본민예관
 
세계 신석기인은 이 세상 만물의 기원이 비(雨, 水)라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이 비는 구름(云)에서 내린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구름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제는 화창하게 맑았는데 오늘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면 두려웠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들은 물이 수증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면 구름이 된다거나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났을 때 구름이 생긴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 세계관 속에서 이 구름의 근원을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세계 신석기인들은 보통 구름을 만들고 주관하는 신(God)을 상정한다. 그에 견주어 암사동 신석기인들은 하늘 속 물이 스스로 구멍(통로)을 통해 구름으로 내려온다고 보았다. 한반도 신석기 미술에서 종교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다. '기원의 기원'까지 담고 있는 세계관에는 신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한반도 신석기 미술은 청동기를 거쳐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 조선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다.

도5,6,7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도5는 청동기시대 옹관이다. 여기에 망자의 뼈를 담아 묻었다. 도6은 5세기 가야 그릇받침이다. 이 그릇받침 패턴과 똑같은 무늬는 신라 그릇에서도 수없이 볼 수 있다. 도7은 18세기 조선민화 속 한 부분이다. 도5,6,7 패턴의 기원은 저 멀리 신석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기원전 8500년부터 시작된 패턴이 1800년대 조선 민화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또한 세계미술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경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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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질·자원·사람>(9·10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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