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내한 앞둔 지휘자 비치코프 “체코필은 자신만의 정체성 가진 악단”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반전 메시지 발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체코필)는 동유럽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로 손꼽힌다. 체코필의 역사는 체코의 국민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가 직접 지휘봉을 잡은 1896년 창단 연주회로부터 시작됐다. 보헤미안적인 독특한 음색을 가진 체코필은 말러의 교향곡 7번,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등 유명 레퍼토리를 초연하는 등 체코 출신 유명 작곡가들에 대한 명확한 해석으로 정평 나 있다.
현재 체코필은 2018년부터 거장 세묜 비치코프(71)가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다. 비치코프가 이끄는 체코필이 오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25일 대구 콘서트하우스에서 내한공연을 한다. 체코필은 1991년 첫 내한공연을 시작으로 이번이 6번째지만 비치코프는 이번이 처음이다. 내한을 앞둔 비치코프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비치코프는 “체코필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자신만의 색과 정체성, 음색, 음악성을 지닌 유서깊은 악단”이라면서 “체코필의 정체성은 몇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체코의 음악적 전통에 기인한다. 그리고 체코필은 이런 정체성을 계속 간직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했다.
냉전 시절 구소련에서 태어난 비치코프는 20세에 라흐마니노프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다. 1975년 23세 때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파리 오케스트라, 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는 등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2017년 오랫동안 악단을 이끌던 지휘자 이르지 벨로홀라베크가 타계하고 슬픔에 빠져 있던 체코필 단원들이 비치코프가 이끈 공연에 감동을 받아 “우리 아빠(Our Daddy)”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으며, 공식적으로 진행된 단원 투표에서도 찬성표 100%가 나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첫 내한에 대한 소감을 묻자 그는 “한국은 처음 방문하지만, 한국 음악가들과는 자주 공연했다. 지난 몇십 년 사이에 한국 음악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이제 한국인 연주자가 없는 오케스트라는 찾을 수 없을 정도”라면서 “누구나 악기 연주를 배울 수 있지만, 클래식 음악과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수준에 오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인 만큼 한국 음악가들의 성취는 놀랍다”고 밝혔다. 비치코프는 지난 4월 체코필의 유럽 투어에선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협연하기도 했다. 그는 “조성진은 정말 뛰어난 음악적 파트너”였다면서 “나와 단원들에게 조성진과 함께한 시간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회고했다.
6년 만의 내한에서 체코필은 드보르자크의 ‘사육제’ 서곡, ‘피아노 협주곡 g단조’, 교향곡 7번을 연주곡으로 선택했다. 앞선 내한에서는 체코 작곡가와 함께 다른 작곡가들의 레퍼토리를 섞었지만 이번엔 체코필의 상징 같은 드보르자크의 작품만으로 꾸렸다. 특히 일본 피아니스트 후지타 마오가 협연자로 나서는 ‘피아노 협주곡 g단조’는 그동안 라이브로는 만나기 어려웠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은다. 비치코프는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은 한국뿐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상할 정도로 잘 연주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많은 면에서 브람스와 베토벤을 합친 듯하면서도 여전히 드보르자크의 음악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비치코프는 오케스트라가 악단의 정체성이 되는 작곡가들의 음악을 선보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음악에만 매몰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체코필은 체코 음악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가 속한 문화의 작곡가 작품만 연주할 수는 없다. 프랑스 연주자가 프랑스 작곡가의 작품만 연주해야 하나?”고 반문하면서 “배우들이 각각의 영화마다 깜빡 속을 정도로 새로운 인물로 변신하듯 음악가들도 그런 역량이 필요하다.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는 자신의 문화와 배경을 떠나 해당 작곡가의 문화적 특색을 처음부터 파고들어 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비치코프는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페이스북에 러시아를 비판하는 글을 올린 데 이어 체코 바츨라프 광장에서 자선 콘서트를 열고 우크라이나 지지를 표명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영국 BBC 방송 등에 출연해 전쟁 반대 의견을 공식적으로 피력해왔다. 이와 관련해 그는 “‘예술과 정치는 서로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오래된 규칙 같은 말이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한 언급은 정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것이다”라며 “나 또한 평생 정치와 관여하지 않고 살았다. 왜냐하면, 정치는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 인류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라면 다르다”고 밝혔다. 이어 “당신이 만약 길을 가다가 누가 봐도 약하고 힘이 없는 자가 폭력적으로 얻어맞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럼 그대로 지나칠 것인가? 아마 최소한 경찰에 신고라도 할 것이다. 나도 그와 똑같은 행동을 했다. 그저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인간답게 행동했을 뿐”이라면서 “때로는 침묵이 악마일 때가 있다. 난 그저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말을 침묵하지 않고 소리 내어 말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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