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욕 달고 사는 남자, 전 세계 영화인이 열광한 이유
[양형석 기자]
지난 2019년 8월 영화계를 떠들썩거리게 한 독립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김보라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고 훗날 드라마 <지금 우리 학교는>과 <작은 아씨들>을 통해 유명세를 얻은 박지후가 주연을 맡은 <벌새>였다.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일어났던 1994년을 배경으로 14살 소녀가 겪는 이야기를 다룬 <벌새>는 3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 14만 관객을 모으며 독립영화로는 '대박'에 가까운 흥행성적을 기록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더욱 놀라운 것은 국내외 영화제에서의 성과였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인 2018년부터 각종 해외영화제에 초청돼 크고 작은 상을 휩쓸었던 <벌새>는 2019년 청룡영화상에서 각본상, 2020년 부일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각본상, 2020년 백상예술대상에서 감독상과 여우조연상(김새벽), 2020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실제로 <벌새>가 2020년 7월까지 국내외 각종 영화제에서 받은 상은 무려 59개에 달했다.
▲ <똥파리>는 1만 관객만 들어도 성공이라는 독립영화계에서 전국 12만 관객을 동원했다. |
ⓒ (주)영화사 진진 |
양익준 감독의 처음이자 마지막 장편영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만 보면 어린 시절부터 선배 감독의 연출부 생활을 하면서 현장에서 영화를 공부했을 듯 하지만 사실 양익준 감독은 대학에서 연출이 아닌 연기를 전공했다. 2002년 영화 <품행제로>로 데뷔한 양익준 감독은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기 경력을 쌓았다. 물론 당시에는 양익준 감독이 맡은 역할 옆에 '똘마니2', '방수공2'처럼 번호가 붙곤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단편영화나 독립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양익준 감독은 2005년 단편영화 <철수야 철수야 뭐하니?>에서 <벌새>의 김보라 감독과 연기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렇게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양익준 감독은 2006년 10월부터 2007년 2월까지 촬영한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를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했다. 1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양익준 감독의 대표작이 된 <똥파리>였다.
공개 후 영화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관객들에게도 뜨거운 관심을 받은 <똥파리>는 개봉 전부터 무려 17개 국제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똥파리>는 2009년 도빌 아시아영화제에서 비평가상과 최우수작품상,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는 영화제 최고상에 해당하는 VPRO 타이거상을 수상했다. 다수의 영화제에서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 받은 양익준 감독은 청룡영화상에서는 김꽃비와 함께 남녀 신인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류승완 감독이나 윤종빈 감독처럼 독립영화로 주목 받은 감독들은 거대 자본의 투자를 받아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를 하는 것이 자연스런 수순이다. 하지만 양익준 감독은 <똥파리>라는 충격적인 데뷔작을 통해 관객들과 영화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후 2023년 현재까지 아직 두 번째 장편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다. 대신 간간이 단편영화를 연출한 양익준 감독은 연기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감독이 아닌 배우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양익준 감독은 2011년과 2013년 <부산행>으로 유명해지는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사이비>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다. 2012년 드라마에 진출한 양익준 감독은 2014년 <감격시대: 투신의 탄생>에서 신의주 밀수조직 도비노리패의 대장 황봉식을 연기했다. 그리고 2021년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서 강력계 형사 진경훈 역을 맡아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연출과 주연을 모두 맡은 양익준 감독은 연출뿐 아니라 배우로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
ⓒ (주)영화사 진진 |
<똥파리>는 어두운 과거를 가진 주인공 상훈(양익준 분)이 용역깡패 겸 사채업자로 일하면서 비슷한 아픔을 가진 여고생 연희(김꽃비 분)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하지만 <똥파리>는 영화의 분위기가 매우 어둡기 때문에 선남선녀 주인공이 등장하는 멜로 영화의 달달함이나 힐링물이 주는 따뜻한 정서 따위는 기대하기 힘들다. 심지어 두 주인공이 데이트하는 장면에서도 배경음악으로 굉장히 어두운 곡이 깔릴 정도.
사실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은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다. 자신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사람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폭력부터 휘두르고 하루라도 욕을 하지 않는 날에는 입 안에 가시가 돋을 것처럼 욕을 입에 달고 다닌다.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좀처럼 활짝 웃는 일이 없고 후배들에게도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상훈이 경계를 풀고 대하는 사람은 같은 상처를 가진 연희와 조카 형인(김희수 분) 뿐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고 조용한 여고생이지만 연희가 처한 상황도 상훈 못지 않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후유증으로 심한 정신 분열증을 앓고 있고 노점상을 하던 어머니는 용역 깡패에 맞서다 사고로 돌아가셨다. 반항적인 남동생은 누나 말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더니 급기야 영화 후반에는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런 연희에게 우연히 알게 된 동네 양아치 상훈은 하나 밖에 없는 친구이자 삶의 위안이다.
많은 독립영화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제작되고 있는 것처럼 <똥파리> 역시 상당히 어렵게 완성된 영화다. 극 중에서 연희가 사는 집은 실제 양익준 감독이 살던 전세집이었고 영화 중반 상훈이 아버지(박정순 분)에게 돈 봉투를 뿌리는 장면에서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돈을 회수했음에도 현장에서 2만 원이 분실됐다고 한다. 또한 다수의 해외 영화제에 초청됐음에도 대부분 상금이 없는 영세한 영화제라 현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똥파리>는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7점 이상의 높은 평점을 줬고 N 포털사이트 네티즌 평점은 무려 9.23점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상훈으로 빙의한 듯한 완벽한 양아치 연기를 선보인 양익준 감독의 열연에는 하나 같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똥파리> 전까진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연희 역의 김꽃비 역시 <똥파리> 이후 독립영화계의 특급유망주로 급부상했다.
▲ 김꽃비는 20대 중반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똥파리>에서 여고생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
ⓒ (주)영화사 진진 |
1997년 연극배우로 데뷔한 김꽃비는 영화 <두사부일체>에 출연했고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단편영화를 넘나들며 착실히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2008년 영화 <똥파리>에서 상훈의 유일한 친구이자 상처를 안고 사는 연희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김꽃비는 <똥파리>를 통해 청룡영화상 신인상과 2009년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영양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김꽃비는 상업영화 쪽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소셜테이너'이기도 하다. 김꽃비는 지난 2011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레드카펫 행사에서 한진중공업의 작업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I ♥ CT85, GANG JUNG'이라 쓰여진 현수막을 펼쳤다. 이는 85호 크레인에서 고공시위를 벌이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해군기지 문제로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제주 강정마을을 응원하는 퍼포먼스였다.
영화 <베테랑>, 드라마 <베가본드> 등에서 인상적인 악역연기를 선보였던 정만식은 <똥파리>에서 상훈이 일하는 용역 겸 사채회사의 사장 만식을 연기했다(영화 후반 상훈의 누나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배우 이름과 캐릭터 이름이 같다). 물론 사채업자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지만 만식은 자신보다 4살 어린 상훈과 친구로 지내고 부하직원에게도 인센티브를 넉넉하게 지급하는 등 영화 속에서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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