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시 등장한 한국 누아르, 이 영화가 좋은 이유
[김동근 기자]
▲ 영화 <화란> 포스터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계속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세상에 태어났고, 어쨌든 성장해 나간다. 그러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린 나이에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부모님의 여러 가지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주변의 영향권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더 성장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다 어른이 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도 자신의 상황을 바꾸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여전히 주변 상황이 주는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만의 특성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주변의 영향을 깨는 건 힘들었으니까. 현대 사회가 되면서 조금은 그 벽이 얇아졌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의 벽을 깨는 것보다는 그 벽을 넘어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한다. 다른 도시로 가고, 더 멀리 다른 국가로 가서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도전해 보길 원한다. 여기엔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환상도 있고, 지금 주변에 있는 강력한 벽이 없어질 거라는 희망도 있다. 그렇게 벽을 넘어 다른 곳으로 간다는 꿈은 다시 현재의 삶을 어쨌거나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네덜란드 이민을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
영화 <화란>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화란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로 떠나고 싶은 18살 소년 연규(홍사빈)의 삶을 비춘다. 연규는 재혼가정에서 살고 있다. 엄마와 새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하얀(비비)과 함께 살고 있지만 하루하루가 고통이다. 매일같이 술 마시는 새아버지는 연규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폭력을 일삼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하얀을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를 폭행하기도 한다. 연규는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기만 한다.
▲ 영화 <화란> 장면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이런 상황에서 지역 조직의 부두목 치건(송중기)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당장 연규에게 급한 돈을 갚아주기까지 한다. 결국 연규는 빨리 돈을 모으기 위해 치건의 조직에 들어가게 되고 이후 본격적으로 조직 생활을 시작한다. 치건은 연규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 내내 치건은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연규에게만큼은 조금 감싸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옥 속에서 서로를 알아본 치건과 연규
영화의 중심은 연규와 치건이다. 이 둘의 삶 속에 밝은 기운을 찾아보기 어렵다. 치건은 과거에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술에 취한 치건의 아빠는 그가 물에 빠진 것조차 알지 못했다. 어쩌면 치건이 물에 빠진 순간부터 그의 삶은 어두운 암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암흑을 연규에게서 본 치건은 아마도 그에게 작은 연민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조직 생활 속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큰 어둠으로 들어가게 된다.
치건이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그냥 해야 되면 하는 거'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들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없고, 그 조직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의미다. 치건은 이미 자신들에게 삶의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말을 연규에게도 그대로 하지만 치건은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그는 자신의 삶은 물에 빠진 순간에 끝났고, 그런 지옥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연규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연규가 그런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오기 싫었을 것이다.
영화 <화란>은 오랜만에 개봉하는 정통 누아르다. 특히나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연규와 치건의 만남과 그들의 관계는 무척 흥미롭다. 영화 초반에 보이는 연규의 삶은 완전한 어둠이고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하지만 치건이 등장한 이후, 더 깊은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치건에게는 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전혀 없지만 연규에게는 여동생 하얀이 있다. 연규에게는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은 빛이 있다는 의미다. 연규와 치건의 관계는 무척 가까워지는 듯하지만 곧 서로 날을 세우는 관계가 된다.
▲ 영화 <화란> 장면 |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오랜만에 등장한 흥미로운 한국 누아르
연규는 네덜란드라는 꿈을 꾼다. 모아둔 돈이 다 쏟아진 걸 보고 그는 절망감을 느낀다. 신인배우인 홍사빈은 연규역을 맡아 주변의 어둠을 무척 잘 표현해 낸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절망감이 그대로 담겼다. 극 중 18살인,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연규는 극 중에서 가장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절망감, 여동생에 대한 연민, 새아버지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치건에 대한 분노 같은 다양한 감정이 홍사빈의 얼굴에 그대로 표현된다.
영화에는 다양한 배우들이 열연을 보여준다. 치건 역의 송중기를 비롯해, 김종수, 정만식 같은 중견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무엇보다 이번 영화가 첫 데뷔작인 비비는 연규의 여동생 역을 맡아 무척 자연스럽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는 한 어린아이가 나온다. 아빠와 둘이 살고 있는 그 아이는 아빠의 사채 빚으로 인해 생일도 제대로 챙겨 받지 못하는 처지다. 그런 아이를 보고 연규는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생일 선물을 선사한다.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연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본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짓고 싶은 미소를 본 것일까. 영화 속 연규의 연민, 치건의 연민이 그들의 삶에 변화를 불어넣어 준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울하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그들만의 화란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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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동근 시민기자의 브런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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