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의 핫플레이스... 군산이 잘 나가는 이유
[슬로우뉴스 기자]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에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 채만식 '탁류' 가운데.
군산 내항의 째보선창은 채만식의 <탁류>에 나오는 포구다. 1899년 개항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호남평야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보내던 항구였고 한때 "강아지도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활력이 넘치는 곳이었지만 1979년 군산 외항이 들어서면서 항구로서 기능을 잃게 됐다.
▲ 군산 내항,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서 물이 빠지면 갯벌이 드러난다. 멀리 바다 건너 보이는 곳이 서천군이다. |
ⓒ 빅팜컴퍼니 |
이게 왜 중요한가
• 매력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100년 묵은 짠내와 무거운 회색의 갯벌, 굴곡의 역사를 품은 낡은 포구가 힙하고 엣지있는 공간으로 변신했다. 맥주 마시러 군산 간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군산의 근대 문화유산과 고군산 군도, 금강 습지 공원 등 관광 자원의 매력도 살아나고 있다. 도시 색깔이 달라졌다.
▲ 군산 맥주. |
ⓒ 빅팜컴퍼니 |
공동체적 해법이 필요했다
▲ 한국 정부는 2012년부터 보리 수매를 전면 중단했다. |
ⓒ 농림수산식품부 자료. |
• 군산시 농업기술센터 김미정 과장은 보리 농가의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2015년 어느날 마침 미식 관광 프로그램을 주제로 특강을 하러 온 빅팜컴퍼니 안은금주 대표를 붙잡고 하소연을 했다. "이대로 가면 보리 농가들 다 망하게 생겼어요."
• 군산시 농업기술센터는 보리 직불제 폐지를 앞두고 흰찰쌀보리 품종을 보급해 식품 외식 업체들에게 권장해 왔다. 보리가루로 만든 보리 진포 빵과 보리 라면, 보리 막걸리, 보리 한과 등등을 콘텐츠로 엮어 미식 관광 루트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논의하던 도중에 맥아를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 사람들이 보리를 안 먹게 된 게 아니라 보리를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고 소비 패턴에 맞게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게 과제였다. 맥아가 단순히 맥주의 원료일 뿐만 아니라 맥주 생산과 관광·문화 상품까지 밸류 체인을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섰다.
• 군산에서 한국 최초로 국산 맥아를 만들기 전까지 한국의 수제 맥주 공장들은 모두 맥아를 수입해서 썼다. 신선한 상태에서 발효를 해야 풍미를 극대화할 수 있지만 국내에 보리맥주를 재배하는 곳이 없으니 달리 대안이 없었다.
• 지금은 군산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17개 수제 맥주 공장에서 군산에서 만든 맥아를 가져다 쓴다. 그동안 수입 맥아를 썼던 대형 주류 회사들도 군산 맥아를 사들여 제품 시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현재로서는 대기업의 물량을 맞출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 군산의 보리밭. |
ⓒ 빅팜컴퍼니 |
더 깊이 들어가 보자
• 군산시는 애초에 판로 개척 차원에서 접근했지만 안은금주 대표는 아예 맥아 재배와 판매를 넘어 원료의 생산과 제조, 가공, 판매까지 일관된 밸류 체인을 만들자는 제안을 내놨다.
▲ 군산의 보리밭. |
ⓒ 빅팜컴퍼니 |
• 한국 최대의 곡창 지대 호남 평야에 안겨 있는 군산은 100년 전부터 막걸리는 물론이고 청주, 소주, 위스키 등을 생산하던 양조 산업의 중심지였다. 안은금주 대표는 "역사적 맥락에 기반 환경까지 맥주의 도시로 부활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말했다.
▲ 군산맥아팩토리 |
ⓒ 군산시 |
핵심은 시행착오
• 경험이 없었고 레퍼런스도 없었지만 '이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맥아를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제 맥주 시장이 뜨기 시작하던 무렵이라 시장도 있다고 봤다.
• 애초에 군산의 주력 상품이었던 쌀보리와 맥주보리는 완전히 다른 품종이었다. 군산시 농업기술센터가 나서서 보리농가들을 설득해서 맥주보리 재배를 독려했다.
• 맥아 제조 기술도 처음부터 익혀야 했다. 여러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듣고 테스트에 테스트를 거치면서 자체적으로 맥아 제조 기술을 확보했다.
• 군산시는 맥주 도시 프로젝트에 '올인'을 하다시피했다. 독일에서 맥아 제조 장비를 들여오고 맥아 공장을 만드는 데 50여억 원이 들었다. 연간 250톤의 맥아를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 이곳에서 지난해 24톤의 맥아와 엿기름을 생산했다. 올해는 9월까지 36톤을 생산했다. 군산시 농업기술센터 이선우 주무관은 "향후 5년 안에 생산 규모를 2000톤 규모로 늘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 군산맥아팩토리. |
ⓒ 군산시 |
• 비어포트의 커다란 통창으로 금강 하구와 갯벌 너머 서천군이 건네다 보인다. 노을이 깃든 포구를 내려다 보면서 갓 따른 생맥주를 들이키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째보선창의 부활이라고 할 만하다.
• 비어포트는 지난해 4만218리터의 맥주를 팔아 7억3203만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 지역 공동체도 살아나고 있다. 맥주를 만든 뒤 버려지는 부산물 맥아박을 활용해 맥아박 에너지바를 만들어 파는 사업도 시작했다. 맥아박에 군산에서 생산하는 흰쌀찰보리와 율무, 딸기, 쌀 조청 등을 섞어 만든다. 군산시가 14억 원을 투입해 작업장을 만들었고 협동조합을 마을기업으로 등록했다. 평균 연령 80세의 할머니 다섯 명이 한 달에 1000봉 한정 제품으로 만들고 있다(주문이 밀려들지만 쉬어 가면서 하느라 더 만들기는 어렵다고 한다).
▲ 김창수위스키의 김창수 대표. |
ⓒ 김창수위스키 인스타그램. |
• 맥주뿐만 아니라 위스키 시장도 개척하고 있다(발효된 맥아에 홉을 넣고 끓이면 맥주가 되고 증류해서 원액을 추출한 뒤 숙성하면 위스키가 된다). 위스키 오픈런 돌풍을 불러 일으킨 '김창수 위스키'가 바로 100% 군산 맥아로 만든 싱글 몰트 위스키다. 20만 원대 중반 제품이 200만 원대에 되팔리기도 할 정도다. 이선우 주무관은 "수입 맥아로 만들어도 큰 차이가 없었을 수 있지만 국산 맥아로 만들었다는 슬로건이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 지난 6월에 열린 '군산 수제 맥주 & 블루스 페스티벌'에는 2만 명 이상이 찾아 로컬 맥주를 즐겼다. 설문 조사 결과 참가자의 36% 정도가 군산 이외 지역에서 방문했다. 4억 6000만 원의 예산이 들었지만 관광 유발과 도시 브랜드 확장 효과를 감안하면 훨씬 더 큰 성과를 얻었다는 평가다. 무엇보다도 도시에 활력이 살아나면서 공기가 달라졌고 스토리도 풍성해졌다. 올해까지는 적자지만 내년부터는 흑자 전환이 가능할 거라는 전망이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왜 1년에 한 번밖에 안 하느냐는 불만도 있었다고 한다.
▲ 군산 수제 맥주 & 블루스 페스티벌. |
ⓒ 군산시 |
• 한국에서 맥아를 만들지 않았던 게 아니다. 비어포스트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국산 보리로 맥주를 만들었는데 한국 전쟁으로 중단됐다가 1960년 이후 다시 맥주보리 농가가 늘어나면서 한동안 맥아 자급률 100%를 기록하기도 했다. 국산 맥주는 국산 맥아로 만드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 국내 주류 소비량, 2014년을 고점으로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9조 원에 육박하는 규모다. / 국세청 자료. |
ⓒ 슬로우뉴스. |
• 맥주보리 재배가 줄어든 건 한미FTA 이후였다. 값싸고 품질 좋은 수입 맥아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경쟁력을 잃게 됐다. 2008년까지만 해도 맥주보리 자급률이 25% 정도 유지됐는데 맥주보리를 재배하는 농가가 줄어들면서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게 됐다. 가뜩이나 한미FTA 이전에는 수입 맥아에 할당 관세를 부과해 국산 맥아를 보호하기도 했는데 관세가 사라지면서 굳이 비싼 국산 맥아를 쓸 이유가 없게 됐다.
• 국산 맥아가 비싼 건 재배 규모가 작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충분한 수요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규모가 돼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 한국의 맥주 시장 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3조 6261억 원. 해마다 수입하는 맥아가 23만 톤에 이른다. 군산시의 국산 맥아 프로젝트는 맥주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야심찬 프로젝트다.
• 군산시의 보리맥주 재배 규모는 35ha에 이른다. 이선우 주무관에 따르면 보리 원맥이 40kg 한 포에 3만4000원 정도인데 맥아로 가공하면 가공 비용을 빼고도 4만8000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그만큼 부가가치가 높다는 이야기다.
• 경쟁 업체가 등장할 가능성도 있을까. 이선우 주무관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민간이 투자해서 이 정도 품질을 유지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 비어포트. |
ⓒ 빅팜컴퍼니 |
한계도 있지만 여전히 큰 기회
• 품질이 결코 떨어지지 않지만 국산 맥아가 더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선우 주무관은 "수입 맥아도 품질은 나쁘지 않다", "좋은 맥아는 얼마든지 있다"면서 "가격 경쟁력에서 크게 뒤쳐지는 게 사실이지만 메이저 기업들보다는 수제 맥주 시장에서는 오히려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소규모로 수제 맥주를 만드는 기업들은 1kg 1700원 정도에 맥아를 들여온다. 이왕이면 국내 맥아를 쓰더라도 크게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다.
• 맥아 1kg이면 대략 5리터의 맥주를 만들 수 있다.맥주 가격에서 맥아 원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대량으로 구매하는 대형 맥주회사들은 원가 절감에 민감하지만 수제 맥주회사들 입장에서는 국산 맥아가 오히려 마케팅 포인트가 되기 때문에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비용이라는 설명이다.
▲ 한국의 수제맥주 시장 규모. 수제맥주협회 자료. |
ⓒ 슬로우뉴스 |
•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맥주 시장 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3조 6261억 원 규모. 수제맥주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수제 맥주 시장은 올해 3700억 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대략 수제 맥주가 전체 맥주 시장의 1% 정도를 차지한다는 이야기다. 군산시는 향후 성장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보고 2차 공장에 추가로 50억 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 군산 내항. |
ⓒ 빅팜컴퍼니 |
인사이트
• 군산 맥주가 잘 나간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여러 지방 정부에서 군산을 벤치마킹하러 찾아온다고 한다. 하지만 군산은 지역적 특성과 역사적 맥락에 맞는 모델을 찾은 것이고 군산에서 가능한 군산의 모델을 다른 지역에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 군산 맥주의 성공 비결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첫째,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수요를 확보하고 산업을 바꾸는 야심찬 전략을 밀어붙였다. 없는 시장을 만들어 낸 것 같지만 원래 있던 시장이고 연관 산업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결과였다. 군산시는 밸류 체인을 통째로 복원하면서 무너진 시장을 다시 만들어 냈다.
• 둘째, 지방 정부가 주도했지만 민간에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 공동체의 참여를 끌어냈다. 열심히 판을 깔아줬고 시민들은 기회를 발견했다. 민간 차원에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장기적인 인프라 구축 사업이었다.
• 셋째, 콘텐츠를 계발하고 관광 상품으로 연계해 지역의 브랜드를 강화하고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을 끌어올렸다. 낡아서 쇠락한 것이 아니고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진 것이었다. 낡은 것은 낡은 그대로 매력이 있고 우리는 언제나 좀 더 본질적인 것을 갈망한다. 그게 바로 레거시(유산)의 힘이고 경쟁력이다. 군산은 그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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