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바게트에 진심, 근육까지 키운다…"근 손실은 빵 손실"

서믿음 2023. 10. 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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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저자는 바게트 예찬론자다. 바게트를 향한 진심으로 책 한권을 가득 채웠다. 저자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바게트를 도구 삼는다. 바게트로 아침을 챙겨 먹을 만큼 출근 시간이 넉넉하고, 한 두 블록 걸어가면 맛있는 바게트를 살 수 있는 동네에 산다는 것. 그리고 바게트의 질과 가격과 안정적인 공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1일 1바게트로도 모자라 직접 발효종을 키워 매주 바게트를 굽고, 빵을 먹기 위해 근육까지 관리하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후천적으로 획득한 빵 만드는 근육, 소중한 빵근을 잃지 말아야지.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그런데 파리에서 먹는 시간을 순전히 만끽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 한 점 없었지만, 이미 알고 있는 음식으로 새삼스럽게 눈이 번쩍 뜨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미 애정이 충만하다고 자부했으니까! 하지만 진부하게도 사랑이란 일절 계획도 없던 순간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존재였다. 그렇다. 놀랍게도 파리에서 느닷없이 새로운 사랑에 빠진 것이다. 바삭하고 고소하고 쫀득하고 말랑하고 향긋하고 예쁘고, 아무튼 좋은 건 혼자 다 하는 바게트에. - 「아무튼 좋은 건 혼자 다 하는」 중에서

빵 바구니를 산다고 내 인생이 확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걸 잘 쓰고 싶어서라도 비슷한 분위기를 내면서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원래 여행 기념품은 그런 희망을 갖고 사는 것이니까. 이 향신료를 사면 나도 맛있는 프랑스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이 옷을 입으면 나도 파리지앵처럼 보일 거야. 미니 에펠탑 모형을 책상에 두면 그때의 기분을 잊지 않을 수 있을 거야. - 「빵 바구니를 산다고 인생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중에서

아침에 갓 구운 바게트를 먹는 단순한 행위에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우선 아침을 챙겨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출근 시간. 장 볼 시간도 없어서 새벽 배송으로 대부분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한두 블록만 걸어가면 맛있는 바게트를 살 수 있는 동네. 바게트의 질과 가격과 안정적인 공급을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위기. 오늘 저녁 밥상에 올릴 고기는 정육점 할아버지가 골라주고, 나만의 마들렌 맛집은 어디인지를 진지하게 토론하는 이상적인 트위터리안 같은 이웃들. 되게 부럽군. 바게트에 이 정도 의미를 부여한 걸 알면 바게트도 부담스러워서 바스러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에서 단순히 맛있는 바게트를 찾아다니며 먹는 것으로는 내가 바라는 바게트 세상을 만드는 데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파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실천했던 1일 1바게트가 이렇게까지 힘들 일인가? - 「나는야 선의의 바게트 빌런」 중에서

그러니까 결론은, 할머니가 되어도 바게트를 반죽할 체력이 있고 구운 빵을 끼니마다 먹을 수 있으려면 다치지 말고 꾸준히 운동해야겠다. 이건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말이다. 바닥에 눕는 것만이 방전된 체력을 충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시절로 돌아가지 말자. 그리고 후천적으로 획득한 빵 만드는 근육, 소중한 빵근을 잃지 말아야지.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중에서

그러니까 내가 딱히 ‘요리’를 하지 않고도 바게트를 마음 편하게 맛있게 먹으려면 빵태계가 갖춰진 냉장고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사무실은 바로 그런 상태다. 갓 구운 바게트님과 그걸 구운 내가 가장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 곳. 자, 본인의 냉장고를 열어보자. 나는 평소 뭘 먹는 사람인가? 우리 집 냉장고는 밥님이 좋아할 세상인가, 빵님이 좋아할 세상인가? 그리고 저에게 말해주세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드릴게요. - 「냉장고 속 빵태계」 중에서

바게트는 언뜻 담백함이 매력인 듯하지만 사실 단순한 풍미의 콘트라스트가 강하게 느껴지는 빵이다. 촉촉하고 말랑말랑하면서 기공이 큼직해 손으로 뜯으며 누르면 순식간에 납작해지는 속살과, 바삭바삭하지만 딱딱하거나 단단하지 않아 부스러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껍질 질감의 조화. 벌어진 칼집과 뾰족한 끄트머리까지 연한 모래색에서 황갈색, 짙은 갈색으로 변화하는 그라데이션만큼이나 옅고 짙은 고소함을 느끼게 하는 껍질의 풍성한 향기. 단순한 빵에서 느낄 수 있는 풍미만 놓고 본다면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는 맛을 전부 보여준다.-「단순함의 미학, 잠봉뵈르」 중에서

바게트 : 근 손실은 곧 빵 손실이니까 | 정연주 지음 | 세미콜론 | 180쪽 | 1만2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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