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에 잡힌 '백인 포로'…장군 돼서 온 인천 식당서 눈물 펑펑, 왜 [Focus 인사이드]

남도현 2023. 10. 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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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뛰어간 곳

1965년 8월, 주한 미 육군 제7 보병사단장으로 부임한 체스터 존슨(Chester L. Johnson) 소장은 부대 인수인계를 마치고 여유가 생기자 부관과 통역만 대동하고 인천으로 떠났다. 인천항(현재 1부두) 맞은편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부근을 샅샅이 뒤진 뒤 화선장(花仙莊)이라는 이름이 붙은 식당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잠시 건물을 바라본 그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누군가를 찾았다.

한국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체스터 L 존슨 미 육군 제7 보병사단장의 육군사관학교 졸업 당시 모습. Find A Grave


그런데 그가 만나고자 하는 인물이 거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름도 몰랐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작정 찾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식당 주인인 김진원(金鎭元)씨를 보는 순간 자신이 오매불망 찾던 인물임을 느꼈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던 그는 김진원 씨의 손을 놓지 않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현역 미군 장성이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였던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사실 존슨 소장에게 한국, 특히 인천은 처음이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필리핀에 배치돼 중위로 근무하던 그는 이듬해 4월 벌어진 바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이후 필리핀 내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45년 1월 인천 포로수용소에 보내져 종전 무렵까지 지냈다. 따라서 인천이 그에게 그다지 반가운 곳은 아니었다.

포로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렸는데, 중노동이나 간수의 학대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영양실조로 죽어간 포로가 상당수였을 정도였다. 이런 고통을 견디다 못한 존슨은 7월께 인천항으로 노역을 나간 도중 동료 3명과 탈출을 감행했다. 체포되면 즉결 처형당할 수도 있었으나, 너무 배가 고파 이들은 목숨까지 걸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포로수용소 밖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영국군 포로였던 해리 킹슬리가 그린 게이죠(京城ㆍ서울) 포로수용소. Lancashire Infantry Museum


일본 내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던 연합군 포로들. 식량 사정이 나빠 피골이 상접한 모습인데 인천 포로수용소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위키미디어


무조건 앞만 보고 도망쳐 향한 곳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천의 중심 상권이던 신포동이었다. 그들은 몸을 숨기기 위해 다짜고짜 나리낑(成金)이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초췌한 몰골의 서양 포로들과 처음 마주한 사람이 당시 한국인 종업원이었던 김진원씨였다. 그는 너무 놀랐지만, 포로들이 먹을 것을 달라며 애걸복걸하자 부엌에 몸을 숨기도록 한 뒤 따듯한 음식을 내줬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은 포로들은 시간이 지나자 겨우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그때서야 정신을 차려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곧바로 추격한 일본군에 체포돼 다시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김진원 씨도 포로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봉변을 당했다. 존슨은 지옥 같은 기간 중 있었던 유일한 환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20년 만에 한국에 부임하자 은인을 찾았던 것이었다.

존슨을 비롯한 3명의 탈출 포로들이 김진원씨로부터 음식을 제공받은 식당이 있었던 건물의 현재 모습. 약간의 개축이 있었던 것 외에 당시와 그다지 차이가 없다. 다음 스트리트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당시 종업원이던 김진원씨가 광복 후 일본인 사장이 귀국하면서 식당을 넘겨받아 계속 운영 중이었기에 이들의 극적인 재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젊은 존슨에게 인천은 악몽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장군이 된 존슨에게는 고단했던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추억의 장소로 남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인연도 일본군이 생포한 포로들을 수용한 수용소가 인천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는 사라진 흔적

전쟁이 벌어지면 필연적으로 포로가 발생하고 이를 관리할 수용소가 필요하다. 통상적으로 포로수용소는 포로의 탈주나 저항을 막기 위해 최대한 전선과 멀리 떨어진 후방에 설치한다. 또한 6ㆍ25 전쟁 당시 폭동이 벌어졌던 거제도수용소처럼 규모가 너무 크면 관리가 힘들기에 되도록 여러 곳에 분산하는 것이 원칙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도 열도 곳곳에 200여 개의 포로수용소를 운영했다.

싱가포르에서 수송선 후카이마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호주군 포로들. 이들 대부분으로 서울수용소로 옮겨갔다. 호주전쟁기념관


그런데 일본만으로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한 인천을 비롯해 서울ㆍ부산ㆍ흥남에도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이는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일제감정기 한반도 주둔 일본군을 조선군이라 불렀다) 사령부가 전쟁 중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꺾고 지배를 원활히 하려는 목적으로 포로수용소를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인 포로를 노출하면 일본의 강력한 힘을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 1942년 초 말레이반도 및 싱가포르에서 잡힌 영국군ㆍ호주군ㆍ뉴질랜드군 포로를 시작으로 이후 미군이 위에 언급한 4곳의 수용소에 수감됐는데, 대략 1000여 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진다. 범전동 시민공원 자리에 위치하던 부산수용소는 마치 군대의 보충대처럼 서울ㆍ인천수용소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물던 곳이었다. 흥남수용소는 인천ㆍ서울수용소가 포화 상태가 되자 1943년 추가 설치됐다.

1944년 12월 25일 연합군 정찰기가 촬영한 인천 포로수용소의 모습. 현재의 신광초등학교자리다. 미 육군


가장 규모가 컸던 인천수용소는 인천항 부근의 신광초등학교에 존재했고, 서울수용소는 조선군사령부(현 용산기지) 인근의 학교법인 신광학원 자리에 있었다. 사전 의도대로 많은 한국인이 볼 수 있고 노역 동원에 편리한 장소였는데, 더불어 항구와 부대 같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 막으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수용소의 위치를 일부러 노출하면 포로의 안위 때문에 연합군이 부근을 함부로 폭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 정보 당국이 1944년 12월 항공 촬영한 당시의 사진을 보면 연합군 측도 포로수용소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수용된 포로의 피해를 우려해 연합군이 이 일대에 대한 폭격은 당연히 삼갔다. 특히 인천수용소는 일본이 항복한 뒤, 38선 이남의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인천에 상륙한 미 제24군단이 포로를 구하기 위해 제일 먼저 접수한 시설이기도 했다.

1945년 9월 9일, 서울 포로수용소에서 해방된 영국군 포로들이 기뻐하는 모습.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어느덧 이런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오히려 한반도에서 교전이 없었기에 제2차 세계대전을 남의 일로 착각하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일본이 침략 전쟁 때문에 우리는 물질적으로 엄청난 수탈을 당했고, 징용 등으로 극심한 고초까지 받은 주요 당사자다. 그래서 비록 우리 의지는 아니었지만, 우리 땅에서 벌어진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들 포로수용소에 대한 기념물 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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