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버지와 커플 춤 춘 이유…파격적인 ‘19금 오페라’

유주현 2023. 10. 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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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살로메’


엄마가 죽은 아빠의 동생과 재혼을 했는데 엄마의 새 남편, 즉 삼촌이 소녀에게 추근댄다. 지저분한 집구석에 질린 소녀는 엄마의 음탕함을 꾸짖는 순결한 예언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대쪽같은 그를 죽여서라도 소유하고픈 소녀는 삼촌에게 섹시댄스를 춰 주고 은쟁반에 담긴 예언자의 목을 요구한다.

현대 오페라의 지평 넓힌 작품

세계 정상급 연출가 미하엘 슈투르밍어가 연출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는 시그니처 장면인 ‘일곱 베일의 춤’과 세례요한의 죽음 등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했다. [사진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최신 막장드라마 시놉시스인가 싶지만, 1905년 나온 오페라의 서사다. 6일 막 올린 대구국제오페라축제(예술감독 정갑균) 개막작 ‘살로메’다. 5주 동안 펼쳐지는 대구국제오페라축제는 지난해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주역 가수와 오케스트라 등 240여명이 내한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에 이어 올해는 ‘바그너의 계승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대표작 ‘살로메’(6~7일)와 ‘엘렉트라’(20~21일)를 들여와 주목받고 있다.

베르디나 푸치니의 주인공들은 마음만 먹으면 금세 볼 수 있지만, 팜므 파탈의 대명사인 살로메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가 국내에서 잘 공연되지 않는 탓이다. 올해 스무돌을 맞은 대구오페라축제도 ‘살로메’를 처음 올렸다. 1994년 정명훈이 이끈 바스티유오페라단 내한공연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제작된 역사는 2008년 국립오페라단 초연 등 한손에 꼽힌다.

세계 정상급 연출가 미하엘 슈투르밍어가 연출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는 시그니처 장면인 ‘일곱 베일의 춤’과 세례요한의 죽음 등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했다. [사진 대구국제오페라축제]

충격적인 19금 시놉의 원전은 성서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의 죽음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오스카 와일드가 퇴폐적이고 탐미적인 드라마로 각색하고, 슈트라우스가 음악을 입혀 1905년 초연했다. 15편의 오페라를 남긴 슈트라우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준 첫 성공작이자 파격적인 스타일로 현대 오페라 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뉴욕 메트 등 유수의 오페라극장에서 음란물로 낙인찍혀 20여년간 공연 불가 판정을 받기도 했던 문제작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은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극장의 2016년 프로덕션을 대구오페라축제가 리바이벌한 버전이다. 빈 폭스오퍼 지휘자 로렌츠 아이히너가 이끄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연주로 독일어권 최고의 살로메로 꼽히는 소프라노 안나 가블러와 헤로디아스 역의 메조소프라노 하이케 베셀, 헤롯왕 역의 테너 볼프강 아블링어 슈페르하케, 요한 역의 바리톤 이동환이 함께 고품격 무대를 빚어냈는데, 영화감독이기도 한 미하엘 슈투르밍어의 연출력이 발군이었다. 슈투르밍어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빈 슈타츠오퍼 등에서 활약하는 세계 정상급 연출가로, ‘살로메’로 2018년 오스트리아 음악극상 최우수 오페라 작품상을 받았다.

오페라는 옛날 이야기에 입혀진 고전 음악을 현대인의 시선으로 감상하기에 곧잘 인지부조화가 발생한다. 그런데 20세기 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살로메’는 오히려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원하는 오페라가 된 것 같다. 기원전 30년경의 이야기를 초현대적인 무대로 뽑아낸 덕이다. 성남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정구호 연출의 ‘나비부인’이 2576년의 우주로 날아가는 등 배경을 현대로 가져온 오페라는 많지만, 이만큼 찰떡인 무대는 본 적 없었다. 고대 왕궁이 아니라 재벌가 대저택 같은 세트에, 의상도 왕족과 병사, 시종이 아니라 요즘 부자들의 파티 스타일과 비서, 경호원의 차림새다. 오직 세례요한만 고대로부터 타임슬립해 천지개벽한 세상에 적응 못하는 듯한 모양새가 딱 ‘별에서 온 그대’ 같다.

‘살로메’의 진가는 시그니처 장면인 ‘일곱 베일의 춤’에서 드러난다. ‘관현악의 마법사’ 슈트라우스다운 도발적인 연주곡에 맞춰 살로메가 관능적인 춤을 추며 한 겹씩 옷을 벗어 알몸이 되는 연출이 통상적이라 ‘19금 오페라’로 통한다. 그런데 이 무대에서 옷을 벗는 건 살로메가 아니라 헤롯왕이다. 왈츠음악에 동양적 선율이 교차하는 오묘한 분위기 속 펼쳐지는 두 남녀의 위험한 2인무는 그 어떤 무용작품의 그것보다 인상적이었다. 뇌쇄적인 춤이 아니라 힙합스러운 파워풀한 춤을 추는 살로메는 마치 헤롯왕을 춤추게 하는 지휘자 같았다.

음란물 낙인, 20년간 공연 못해

세계 정상급 연출가 미하엘 슈투르밍어가 연출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는 시그니처 장면인 ‘일곱 베일의 춤’과 세례요한의 죽음 등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했다. [사진 대구국제오페라축제]

회전무대의 활용도 압권이다. 원형 무대를 불완전한 외벽처럼 둘러싼 반투명 유리 구조물이 두 사람의 춤을 아슬아슬 드러내고, 반투명 유리가 스크린이 되어 이들이 실시간으로 찍고 있는 핸드폰 영상을 비춘다. ‘가림으로써 드러내는’ 역설로 장면의 핵심인 관음증을 자극하는 기막힌 연출이다.

이제 세례요한의 목을 받아들 시간.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장면답게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음악으로 엔딩을 선사하는데, 미장센도 충격적이다. 빙글빙글 도는 무대에 조명과 영상이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불협화음과 날카로운 선율이 휘감으며 극한의 몰입감에 도달한 순간, 요한의 시신이 드러난다. 은쟁반에 담긴 목이 아니라 피칠갑이 된 몸 위에 살로메가 올라타 욕망과 갈망을 토해낸다.

이쯤되면 살로메 역의 소프라노가 진정 극한직업임을 깨닫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를 지키며 노출을 동반한 춤은 물론, 엄청난 음량의 오케스트라를 뚫어내며 광란의 연기까지 소화해야 하니, 공연이 드문 이유다.

가사 한마디 바꾸지 않고 기원전 옛날 이야기를 완벽한 현대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움이다. 슈투르밍어가 창조한 우리 시대의 살로메는 단순한 팜므 파탈은 아니었다. 견딜 수 없이 부정한 환경에서 아름답고 깨끗한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된 사이코패스였다. 살로메를 죽이라는 헤롯왕의 명령에 나타난 병사들이 헤롯 일가를 몰살시키는 엔딩은 마치 영화 ‘기생충’과도 같은 감흥을 줬다.

월드클래스 완성도로 뽑아낸 이번 무대는 왜 ‘살로메’를 현대오페라의 시작이라 하는지 제대로 보여줬다. 보수적인 예술이라고 여겼던 오페라가 이렇게 진보하는 동시대적 감성을 표현할 수 있다니,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초연 당시 연주자들이 작곡가에게 항의했을 정도로 연주도 어렵고 오페라 가수가 춤까지 춰야 하는 고난도지만, 그만큼 오페라의 지평을 넓힌 작품이다. 성년이 된 대구오페라축제가 한국 오페라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다면, 그 시작을 알리는 무대로 더할 나위 없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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