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넘어서도 작업 하던 단색화 대가 박서보…92세로 타계
'단색화 대가' 박서보(본명 박재홍) 화백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박 화백은 캔버스에 무수히 선을 긋는 '묘법'(escrite) 연작을 통해 한국 현대 추상미술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평론가, 행정가, 교육자로서 평생을 한국 현대미술을 일구고 국내․외에 알리는 데 힘써왔다.
박서보는 1956년 구상 위주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비판하는 ‘반국전 선언’을 통해 기성 화단에 도전했다. 1957년에 발표한 작품 ‘회화 No.1’으로 국내 최초 앵포르멜(유럽식 끈적끈적한 느낌의 추상화) 작가로 평가받았다.
박서보를 한국 화단에 굳건히 자리매김 시킨 것은 단색화로 평가받는 묘법 연작이다. 묘법은 1967년 세 살배기 아들이 국어공책에 쓴 글씨를 보고 영감을 얻어 시작됐다. 작가는 2019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세 살배기 둘째 아들이 제 형이 쓰는 국어 공책 네모 칸 안에 글자를 집어넣으려고 애쓰다가 안 되니까 빗금을 쫙 긋고는 포기를 하더라. 내가 찾던 게 그거였다. 대학 와서 계속 나 자신에게 ‘너는 누구냐. 서양 놈 했던 찌꺼기를 했던 게 아니냐’라고 반문을 하다 책을 읽었다. 노자 장자 불경까지 죽자사자 읽었다.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어떻게 비우나, 그 방법론을 몰랐는데 둘째 아들의 포기를 보고 힌트를 얻었던 거다.”
묘법은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전기 묘법시대(1967∼1989)를 지나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것을 화폭에 올린 뒤 도구를 이용해 긋거나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한 후기 묘법시대,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자연의 색을 작품에 끌어들인 유채색 작업까지 다양하게 변주돼 왔다.
박서보는 1975년 단색화의 시발이 된 도쿄 도쿄화랑에서 열린 ‘5가지 흰색전’에 권영우, 이동엽, 허황, 서승엽 등과 함께 참여할 걸 계기로 단색화 대표 작가로 부상하였다.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며 행정력과 기획력, 추진력을 발휘해 1990년대 이후 단색화가 국제 미술계에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로 호명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홍익대 사단을 이끌며 미술계에 군림한 패권주의자라는 비판도 따라다닌다.
박서보는 묘법 연작에 대해 ‘조선의 도공이 물레질하듯’ ‘수신을 위한 수행의 도구’라고 자평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단색화 전시는 이전까지 ‘단색조’ ‘한국적 모노크롬’ 등 다양하게 불리던 이름이 단색화로 수렴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서보를 위시한 이우환, 정상화, 하종현 등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은 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부상했다. 박서보는 생존 작가로서 이우환에 이어 두 번째로 작품 가격이 10억원이 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베니스, 홍콩, 뉴욕 등 국내외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으며 미국 뉴욕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일본 도쿄도 현대미술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홍콩 M+미술관 등 세계 유명 미술관이 고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고인은 1962∼1997년 모교인 홍익대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홍익대 미대 학장(1986∼1990)과 한국미술협회 이사장(1977∼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석류장(1984년)과 옥관문화훈장(1994), 은관문화훈장(2011), 금관문화훈장(2021) 등을 받았고 제64회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고인은 아흔을 넘어선 나이에도 작업을 계속했던 박 화백은 올해 2월 페이스북을 통해 폐암 3기 진단 사실을 스스로 밝히며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작업 의지를 드러냈다.
고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제주도에 건립 중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명숙씨를 비롯해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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