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밑에 묻힌 홍범도 장군, 술 한잔 올리러 갑니다
[김종훈 기자]
▲ 여천 홍범도 장군 생전 모습. |
ⓒ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
10월 13일 오후 5시 12분 퇴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기사를 마감하지 못한 탓에 정신이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요지만 살피면 아래와 같다.
13일 진행된 국가보훈부 국정감사에서 서울 현충원 등에 항일과 친일 인사가 같이 안장돼 있는 문제를 민주당 오기형 의원이 지적했고, 이에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답변했다는 내용.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다. 지난 7월 방송에 나와 국가가 공인한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라며 이에 자신의 직을 걸겠다고 말한 박 장관이 13일 열린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국가 공인 친일파 아래 잠든 지사들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하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럴 것이 박 장관은 해당 발언 후 누구보다 앞장서서 국가 공인 친일파 백선엽을 비호하고 옹호해 온 인물이다. 결정적으로 현충원 홈페이지 백선엽 안장자 기록에 기재돼 있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게 했다. 그런데 13일 오후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기존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 박민식= "의원님 지적은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시다시피 국립서울 현충원은 국군묘지에서 출발했다. 이제는 종합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홍범도 장군과 정부에서 공인한 친일반민족행위자 5인이 한 공간에 안장돼 있다. |
ⓒ 이은영 |
박민식 :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뭐 의원님..."
그러나 이날 국감에서 박 장관은 끝끝내 백선엽의 친일 기록을 삭제한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아버지가 친일이 아니듯 당시 아픈 역사적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라며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켰다고 해서 그게 역사적 진실이 되는 건 아닌데 국회에서 친일이다, 아니다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 고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안장식이 15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렸다. |
ⓒ 공동취재사진 |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날 국감에서 언급된 국가 공인 친일파 12인은 오 의원의 지적처럼 여전히 서울 현충원과 대전 현충원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은 채 애국지사 및 순국선열 묘소 머리 위에 잠들어 있다는 점이다. 2020년 7월 15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을 비롯해 김백일, 신태영, 신응균,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김홍준, 송석하, 신현준, 백홍석, 김석범이다.
이들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2004년 대통령 소속으로 발족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선정된 국가 공인 친일파다. 해당 위원회는 노무현 정권 때 출범했지만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 11월 활동이 종료됐다. 이 의미는 이명박 정권이 발표한 국가 공인 친일파에 이응준을 제외한 백선엽 등 11인이 선정됐다는 뜻.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만이 위원회 초기인 2006년 친일파 1기 명단에 포함됐다.
2009년 11월 위원회는 4년 6개월의 활동을 끝내면서 4부·25권, 총 2만 1000여 쪽에 달하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를 발간했고, 해당 보고서에는 1기·2기·3기에 따라 국가 공인 친일인사 총 1005명의 명단이 실렸다.
▲ 참배를 온 이들이 가져다 놓은 꽃과 과일과 떡 등이 홍범도 장군 묘 앞에 놓여 있다. 2023.9.24 |
ⓒ 임재근 |
오는 10월 28일 대전 현충원에서 '홍범도 장군께 술 한잔 올리러 가자'는 제목으로 현충원 투어를 진행할 예정이다. 14일 기준 이미 서울과 경기, 대전, 울산, 부산 등 전국에서 스무 분이 넘는 시민들이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과 함께 영화 <밀정>의 실제 주인공 의원단원 김시현 선생의 부인이자 유관순의 이화학당 선배인 권애라, 백범 김구의 큰아들 김인, 어머니 곽낙원, 1919년 홍성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이재만,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친일청산을 외친 조문기, 일왕에게 폭탄을 던지려다 치바형무소에서 순국한 의열단원 김지섭, 카자흐스탄에서 사후 78년 만에 귀향했지만 백선엽 묘 아래 묻힌 홍범도, 마지막 광복군으로 활약했던 고대 총장 김준엽,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실제 주인공 황기환, 수유리에서 모셔왔지만 이름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무후광복군 17인, 이외에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 임정의 살림꾼 정정화, 의열단 최고의 조련사 이종희 앞에 설 거다.
그리고 이들 애국지사와 순국선열 앞에 서서 부정의가 정의로 포장돼, 부도덕한 자가 영웅으로 평가받는 세태를 막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죄할 거다. 특히 고 신영복 교수의 글씨체로 '애국지사 홍범도의 묘'라고 적힌 홍 장군의 무덤에는 소주 한 잔 가득 부어 올릴 것이다.
개인적으로 금번 현충원 투어는 2018년 이래 스물아홉 번째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왜 돈도 안 되는 투어를 수년동안 반복하고 또 반복하냐'고 묻는다. 간단하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국가 공인 친일파 아래 잠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의 현실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 이 감정을 여럿과 함께 느끼고 싶어서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들의 걸음이 현실을 바꾸는데 양분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까지 현충원 투어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28일 오전 11시 대전 현충원 현충문 앞에서 여러 시민을 만났으면 좋겠다. 언제나 그렇듯 현충원 투어는 공익 목적의 비영리행사라 무료다.
['홍범도 장군께 술 한잔 올리러 갑시다' 대전 현충원 투어 안내]
일시 : 2023년 10월 28일 토요일 11시~16시 / 대전 현충원 현충문 앞
코스 : 현충문 – 권애라 - 홍범도 – 백선엽 – 독립유공자 묘역 – 국가 공인 친일파 묘역 등
안내 : 김종훈 기자 / <임정로드>, <약산로드>, <현충원한바퀴> 저자
신청 : https://naver.me/xLJRq445
※ 음료 및 간식 각자 지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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