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배경 '연인', 한 가지 아쉬운 점
[김종성 기자]
병자호란을 다루는 MBC <연인> 같은 사극에 당연히 등장해야 하는데도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있다. 폐주 광해군이 바로 그다.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에 병자호란이 발생했지만, 그렇더라도 광해군이 등장하거나 거론될 필요가 있다. 이 시대를 다루는 사극들은 그런 점에서도 아쉬움을 남긴다.
▲ MBC <연인> 한 장면 속 소현세자 모습. |
ⓒ MBC |
'광해우'의 유례
광해군이 눈감은 그날을 전후해 제주도에서 큰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 뒤 제주 사람들은 해마다 그 무렵에 내리는 비를 '광해우'로 불렀다고 한다.
첫 광해우가 내리기 18년 전인 1623년에 광해군이 폐위됐다. 폐위되고도 꽤 오래 생존했던 것이다. 그 18년 동안에 정묘호란도 있었고 병자호란도 있었다. 인조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이 그 기간에 있었던 것이다. 인조가 사망한 것은 1649년이다. 임금인 인조와 폐주인 광해군이 꽤 오랫동안 한 하늘을 이고 공존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조카인 인조로부터 쿠데타를 당한 지 열흘 뒤인 인조 1년 3월 23일(1623년 4월 22일) 강화도로 유배됐다. 그 직후 그는 참담한 일들을 겪었다.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폐세자인 아들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들렸다. 폐세자빈 박씨는 나무 위에서 망을 보다가 남편이 체포돼 되돌아오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무에서 떨어졌다. 폐세자 부부는 그 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강화도로 끌려온 데 이어 아들 부부마저 그렇게 되자, 광해군의 부인인 폐비 류씨는 가슴에 화병이 생겼다. 그는 162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광해군은 여기저기 끌려다녔다. 강화도 서쪽 교동도와 충청도 태안에서도 유배 생활을 했다. 제주도로 간 것은 병자호란이 끝난 해인 1637년이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23권에 따르면, 그가 제주도로 이송되는 과정은 한 편의 첩보 영화 같았다. 4면을 휘장으로 가린 선박에 실려 비밀리에 이송됐다.
광해군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배가 제주도에 닿은 뒤에야 그곳이 제주도임을 알게 됐다. 자신이 제주도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며 슬퍼했다고 <연려실기술>은 말한다.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 내가 어찌 여기 왔느냐!"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뒤 광해군이 거처한 집은 네덜란드인인 헨드릭 하멜의 표류기에도 등장한다.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재위할 때인 1653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이 제주목사에 이끌려 안내된 숙소가 바로 거기였다. <하멜 표류기>에 이렇게 적혀 있다.
"목사는 우리를 어떤 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은 현 왕의 숙부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는 왕위를 찬탈하고 선왕을 폐위하려다 이 섬으로 유배되었던 것이다."
표착 당시 하멜은 조선말을 당연히 몰랐다. 조선말을 배운 뒤에 현지인들로부터 그 집의 내력을 들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당시 임금인 효종의 숙부가 아니라 당숙이었다. 촌수 관념이 확실했던 당시 사람들이 하멜에게 잘못 알려줬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멜이 제대로 듣고도 자기 나라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멜이 말한 '선왕'은 인조다. 광해군이 인조를 폐위하려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당했다는 하멜의 기록은 실제 사실이 아니지만, 이 대목은 <연인> 같은 사극에 광해군이 꼭 등장해야 할 이유를 시사해준다.
광해군을 몰아낸 보수층은 그를 패륜아로 취급했다. 아버지 같은 나라인 명나라를 배신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엄연히 새어머니인 인목대비를 괄시했다는 게 이유였다. 광해군의 개혁정책으로 불이익을 입게 된 것이 광해군을 미워한 실제 이유였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런 명분을 들어 자신들의 미움을 합리화했다.
집권층은 광해군을 그렇게 다뤘지만, 광해군은 그 뒤로도 상당한 신망을 누렸다. 유효립 역모 사건이 발각된 1628년에도 그의 이름이 거론됐다. 인조 6년 1월 11일자(1628년 2월 15일자) <인조실록>에 따르면, 유효립의 동조자인 유두립에게서 '폐주를 복위시키려 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인조 9년 2월 3일자(1631년 3월 5일자) <인조실록>에는 유교 사대부가 아닌 승려 출신들이 광해군 복위를 모의한 사건이 나온다. 이 모의자들은 유배 중인 광해군을 모셔온다. 신라 부흥을 위해 경상도에서 거병한다 등등의 논의를 하다가 발각됐다.
신라 왕실과 연관 없는 광해군을 신라 부흥의 기수로 세우고자 했다는 것은 광해군의 인기가 그만큼 높았음을 방증한다. 이 역모 사건으로 30여 명이나 처형된 사실은 광해군 이름을 내걸고 목숨을 걸 만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광해군에 대한 세상의 신망이 그 정도였기 때문에, 인조 정권은 광해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 정권의 경계심은 광해군의 유배지가 변경된 시점들로도 반영된다. 위 <연려실기술>은 유배지가 강화도에서 태안으로 변경된 것은 1624년 이괄의 난 때문이고, 교동도에서 제주도로 변경된 것은 1637년 병자호란 때문이라고 말한다.
▲ MBC <연인> 한 장면. |
ⓒ MBC |
병자호란이 1636년 12월에 발발했다고 적힌 서적들이 적지 않지만, 이는 실록에 적힌 12월이 양력이 아니라 음력인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다. 음력 12월은 이듬해 양력 1월이 되기 쉽다는 점을 간과해서 생긴 일이다.
1624년 이괄의 난과 1637년 병자호란은 인조의 리더십 위기를 초래했다. 인조의 위상이 흔들릴 때마다 광해군을 더 먼 곳으로 보낸 것은 혹시라도 광해군이 여론의 지지를 업고 복권되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인조 정권이 1624년에도 그런 걱정을 했고 1637년에도 동일한 염려를 품었다는 것은 광해군이 얼마나 오랫동안 대중적 주목을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그 중간에 발생한 역모 사건들까지 감안하면, 유배 중인 광해군이 한양 정권에 커다란 압박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광해군이 인조를 폐위하려다가 제주도로 오게 됐다고 하멜이 부정확하게 기록한 이유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를 높여준다. 광해군이 인조 정권에 그 정도로 위협이 됐기에 <하멜표류기>에 그렇게 기록됐다고 볼 수 있다.
그 같은 시대상을 감안하면, 인조 시대를 다루는 사극에는 폐주 광해군이라는 변수가 당연히 반영돼야 한다. 광해군을 항상 의식하는 인조 정권과, 여차하면 광해군을 모셔오겠다는 재야 혹은 야당 세력의 동향도 스케치돼야 이 시대를 제대로 다루는 사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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