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후드와 임꺽정, 의적 이야기가 달리 보이는 이유
[김성호 기자]
의적이란 말이 있다. 도둑을 뜻하는 적(賊)이란 글자 앞에 의롭다는 의(義)를 붙여 의적이라 일컫는다. 남의 것을 빼앗아 훔치는데 어떻게 의로울 수 있을까. 의적의 탄생 앞에 반드시 전제조건이 필요한 이유다. 의적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태어난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잘 사는 이의 것을 빼앗아 없이 사는 이들과 나누는 자, 세상은 그를 가리켜 의적이라 칭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 의적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때로는 역사적 인물이고, 또 때로는 전설 속 인물이기도 한 의적의 이야기가 문화며 국경을 넘어 민중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 <닥터 후> 뉴 시즌 8 에피소드 3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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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자, 가장 유명한 의적과 만나다
<닥터 후> 뉴 시즌 8, 에피소드 3는 의적의 이야기다. 그것도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의적의 본고장으로 닥터(피터 카팔디 분)와 그의 컴패니언 클라라(제나 콜먼 분)가 우주선 타디스를 몰아간다. 그곳은 다름 아닌 12세기 영국 셔우드 숲, 의적 로빈 후드가 사는 곳이다.
그들이 셔우드를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다. 너무 많은 곳을 오간 탓에 더는 가고픈 곳이 없어진 닥터다. 닥터는 클라라에게 갈 곳을 정해보라 권하고 클라라가 꼽은 곳이 바로 로빈 후드의 고장인 것이다. 그녀가 늘 로빈 후드를 만나고 싶었다고 하자, 닥터는 난색을 표한다. 그도 그럴 것이 로빈 후드는 역사적 인물이라기 보단 전설 속 영웅인 때문이다.
로빈 후드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져오지만,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기록은 일천하다. 어떤 이야기는 그가 귀족 출신이라고 말하지만, 또 어떤 이야기는 소작농 출신이라거나 도망자 출신이라는 등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현재 확인 가능한 로빈 후드의 기원은 <농부 피어스의 환상>이라는 14세기 서사시로, 15세기 들어 인쇄술이 보편화되며 각지의 민담 속에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그 활약담이 기록되기에 이른다.
▲ <닥터 후> 뉴 시즌 8 에피소드 3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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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된 전설인가, 기록할 의적인가
바로 이 시대에 의적 로빈 후드의 이야기가 흥행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12세기 영국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리처드1세가 긴 출정에 나서고, 그와 별개로 프랑스로 수차례 출병을 하던 시기다. 이로 인해 당대 농민들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만 했다. 왕이 길게 나라를 비운 나라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는 굳이 적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동생인 존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얻을 만큼 나라가 바로 서지 못했고, 봉건귀족들은 제 영지에서 농노들을 갈취해 부를 쌓았다. 농민의 삶을 돌보는 이가 없는 현실은 영웅을 필요로 하고, 그저 귀족에 맞선 어떤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의적이란 이미지를 덧씌웠던 일이다.
닥터와 클라라가 셔우드를 찾았을 때 둘이 전혀 다른 기대를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식으로 가득한 닥터는 로빈 후드가 실재하는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클라라는 이 같이 많은 설화가 있다면 적어도 실체는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이 에피소드가 그리는 것이 바로 전설 속 실체를 확인하는 이야기로, 로빈 후드를 만난 닥터는 좀처럼 그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닥터는 상대와 여러 위험을 함께하고 마침내 그가 진짜 영웅적 기질을 갖춘 이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
▲ <닥터 후> 뉴 시즌 8 에피소드 3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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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의적, 임꺽정이 떠오르는 이유
이들 중에서도 의적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건 역시 임꺽정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임거질정(林巨叱正)이란 표기로 등장하는 그는 백정 출신으로 조선 명종 대에 이르러 도적떼를 거느리고 함경도와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휩쓸며 관아와 민가를 털 만큼 큰 세를 이루었다. 1560년엔 한양까지 출몰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정이 이를 반란군으로 여기고 보낸 토벌굴과 맞서 싸울 만큼 군기를 세우기도 했다. 의적 활동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고 도리어 당대 사회를 혼란케 했던 대규모 도적 일당이 오늘날 의적의 대표주자가 된 데는 작가의 역할이 컸다.
독립투사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장편소설이 임꺽정을 재발굴했다 보아도 좋겠다. 일제치하인 1928년부터 1940년대 초까지 <조선일보> 등에 연재된 소설 임꺽정은 일제 식민지의 여러 부조리 가운데서 말살되어가는 민중의 얼을 일깨운 작품이었다. 사라지는 민족의 말과 글을 폭넓게 담아내는 한편으로, 사회 부조리에 분연히 대항하여 맞서는 민중의 이야기를 그림으로써 홍명희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테다.
20세기 초 한민족이 처한 암담한 상황은 권위에 도전하는 무질서한 영웅을 필요로 했다. 갈수록 요원해지는 독립에의 희망을 고취시키고 일상의 부조리를 일깨우는 민중의 소설로써 홍명희는 도적 임꺽정에게 새로운 역할을 맡겼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실체가 이야기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오늘의 세상은 그와 같은 영웅을 필요로 하기도 하는 것이다.
▲ <닥터 후> 뉴 시즌 8 에피소드 3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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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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