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이슈화, 중국의 자충수 [하재근의 이슈분석]
최근 중국에서 이른바 ‘국뽕’ 영화가 신드롬을 일으켰다. 중국제일주의의 국가적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인데 그중에선 한국전쟁이 배경인 작품들도 있다. 바로 그 전쟁에서 중국이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과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미국의 압박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한국전쟁에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미국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감을 키우려는 것이다. 공산당 1당 통치로도 모자라 시진핑 1인 지배 체제까지 구축하는 상황에서, 혹시 모를 국민의 불만을 대외적 자부심으로 무마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중국 국뽕 영화의 기본적인 특징은 중국이 최강이라는 걸 부각시켜 중국 국민들을 열광시킨다는 점이다. 그것을 통해 그렇게 강력한 중국이 되도록 이끈 공산당의 영도력을 홍보한다. 한국전쟁에선 압록강까지 진격한 미군을 중공군이 밀어냈기 때문에 절호의 홍보 소재다. 그러니 중국 당국이 한국전쟁 배경 영화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항미원조’ 전성시대라는 말도 나왔다.
그런 최강 중국의 모습을 과시한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2021년에 공개된 ‘장진호’였다. 당시 개봉 7일 만에 30억 위안(한화 약 560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며 중국에 애국 열풍을 일으켰다. 영화 속 중공군을 따라서 중국 누리꾼들이 언 감자를 먹는 영상이 SNS에서 화제가 됐고, 영화를 보고 항미원조 열사능원을 찾는 중국인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중공군은 정말 영웅적인 모습으로 미군을 격퇴한다. 미군은 중공군에 비해 무능한 조직으로 그려진다. 이 이야기가 초대박을 치면서 국뽕 전성시대가 열렸고 올해엔 제작비 6억 위안(한화 약 1108억원)의 ‘지원군’으로 이어졌다. 중국 당국은 항미원조 70주년이라며 ‘지원군’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중국내 ‘장진호’ 신드롬으로 인해 한국전쟁 당시의 장진호 전투가 새삼 화제가 됐다. 그전까지 장진호 전투의 내용을 자세히 아는 이가 별로 없었지만, 영화로 인해 진실이 공유되기 시작했다. 장진호 전투가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키워드로 떠오르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일에 현직 대통령으로선 최초로 장진호 전투 기념식에 참석한 것도 이런 흐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장진호 전투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라고 말했다. 중공군의 신화적 승리로 그린 영화 ‘장진호’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시각이다.
영화로 인해 많은 이들이 진실을 알게 됐기 때문에 이런 반대 시각이 힘을 얻는다. 장진호 전투는 사실 중공군이 아닌 미군의 능력이 확인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이 괴멸됐다고 판단해 최대한 빠르게 북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미군 몰래 남하했고, 장진호에 주둔한 미 제1해병사단을 완전 포위했다. 훨씬 많은 병력으로 겹겹이 에워 싼 것이다.
그리고 불시에 공격했다. 산악지형이어서 미군의 기계화 장비가 힘을 쓸 수 없었고, 영하 20~30도 날씨로 땅이 얼어 참호를 파서 엄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보통 이런 식의 급습을 당한 부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전열이 붕괴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미 해병 1사단은 강력히 응전했다.
중공군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미군 사령부에선 1사단에 군수물자를 버려두고 병력만 비행기로 후퇴하라고 했다. 하지만 1사단 스미스 사단장은 불명예스런 후퇴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을 선택했다. 겹겹이 에워싼 중공군을 돌파해 흥남항으로 향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중공군 9병단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보통 포위당해 후퇴하는 군대의 사상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법인데, 장진호 전투에선 포위 공격한 중공군의 사상자가 훨씬 더 많았다. 9병단은 3개월 이상이 지난 후에야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중공군의 남하가 휴전선 이남까지 이뤄지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은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면서 아군의 병력과 장비를 비교적 많이 보존했고, 또 그 전투에 중공군을 묶어놓으면서 흥남 철수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교두보를 쌓았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완벽한 철수 작전 중의 하나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중국이 ‘장진호’를 국뽕 이슈로 띄우면서 이런 진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중국의 자충수다. 자신들의 강함을 과시하려 했지만 오히려 미군의 용맹을 홍보한 셈이 되었다. 중국 누리꾼들도 알음알음으로 진실을 알아가게 되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 때문인지 올해는 한국전쟁(항미원조) 애국주의 영화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 앞에서 언급한 천억 대작 ‘지원군’의 흥행성적이 저조하다는 것이다.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중국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영화는 처음엔 호응 받을지 몰라도 결국 신뢰를 잃고 말 것이다. 주변국의 반발도 불러일으켜 국제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중국은 안 그래도 거대한 강국인데 공격적인 애국주의까지 기승을 부리면 이웃나라의 경계심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중국 당국이 돌이켜볼 일이다.
글/ 하재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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