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섣부른 판단
한국인들의 의식을 조종하기 위한 ‘어둠의 세력’이 온라인에서 암약하고 있는 것일까. 다음 포털에서 펼쳐진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한·중 남자축구 8강전 ‘클릭 응원전’에서 중국팀이 한국팀보다 더 많은 응원을 받은 논란과 관련해 여당 중심 정치권이 공세를 펼치고 있다. 여당은 이번 논란을 ‘드루킹 시즌2’라고 규정했다. 한국 곳곳에서 여론 조작이 펼쳐지고 있다는 프레임도 확산시키고 있다. 이를 보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국민 의식이 외부 세력에 의해 붕괴될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진다.
여당이 띄운 ‘여론 조작’이라는 풍선이 더 높이 날아가도록 정부가 바람을 불어주고 있다. 중심은 방송통신위원회다. 방통위는 응원전 논란이 발생한 직후인 지난 5일 국무회의 관련 설명자료를 발 빠르게 내놨다. 방통위가 이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한 현안보고 내용을 정리해 배포한 것이다. 방통위는 ‘세력’이라는 단어를 반복해 사용했다. 방통위는 “우리나라 포털 서비스들이 특정 세력의 여론 조작에 취약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며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는 행위가 국내는 물론 해외 세력에 의해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확인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외부 세력에 의한 여론 조작’이라는 게 방통위의 시각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방통위 보고 후 ‘여론 왜곡 조작 방지 대책’을 범부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다음을 운영하는 카카오 측의 설명은 방통위의 시각과는 다르다. 카카오는 방통위가 ‘해외 세력’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엄밀하게 틀렸다는 입장이다. 실제로는 ‘해외 IP’이기 때문이다. 카카오 측이 확인 가능한 IP 2294만건을 분석한 결과 50%는 네덜란드, 30%는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 해외에서 유입된 IP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IP를 이용한 존재의 정체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1명이 IP를 반복해 사용했을 수도, 여러 명이 어뷰징을 했을 수도 있다. 방통위 설명대로 여론 조작을 하려는 세력이 조직적으로 벌인 일일 수도 있다. 지역으로 따져보자면 네덜란드와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이 매크로프로그램을 돌렸을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국내에 거주하는 사람이 네덜란드, 일본 등 해외 IP로 우회해 매크로프로그램을 돌렸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일종의 인증사진과 함께 장난으로 클릭 응원전을 조작했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마저도 사칭일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여러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황인데도 방송과 정보통신이라는 과학·기술을 전담하는 방통위가 섣부르게 ‘해외’ ‘세력’ ‘여론 조작’ 등으로 표현한 데 우려가 생긴다. 만약 국민 중 한 사람이 장난으로 벌인 짓으로 결론 날 경우 방통위는 전 국민에게 확인되지 않은 정보, 즉 ‘가짜정보’를 뿌린 당사자가 된다. 꼬리를 물어 혹시나 방통위가 자신들의 판단이 맞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장난을 친 국민을 사상적으로 불순한 존재로 몰아가는 것 아닐까 하는 기우가 떠오른다. 2008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미네르바 사건’이 생각나는 건 우연일까.
방통위 내부에서도 당황스러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방통위의 관련 부서에서는 당초 ‘해외 IP’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방통위의 국무회의 현안보고 및 대국민 설명자료 배포 과정에서 IP라는 단어는 ‘세력’으로 대체됐다. 누가, 왜 IP를 세력으로 바꾸었는지 방통위 내부인이 아니라 알 수 없다. 다만 모종의 이유에 따라 세력이라는 단어를 반드시 써서 공표해야 한다는 일부의 판단이 내려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치려고 한 세력은 누구일까.
카카오의 반응이 미온적인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글로벌 서비스를 지향한다는 카카오는 여당과 방통위에 의해서 ‘내수 기업’으로 낙인찍혔다. 여당과 방통위의 공세는 ‘다음은 한국인만 사용해야 하고, 다음에서 공유되는 정보는 오직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시각에 기반했다. 서비스의 지향점 자체를 좁혀버리는 공세에도 카카오는 경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입장 외엔 침묵을 택했다. 카카오가 자사 서비스를 둘러싼 부정확한 표현·정보를 적극적으로 바로잡는 것은 기업 가치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 카카오가 해외 진출보다는 철저히 내수만을 겨냥해 기업 경영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라면 모를까.
전성필 산업1부 기자 f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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