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영토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2023. 10. 1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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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불신자의 성지순례

[김찬호 기자]

로마를 여행하며 놀랐던 점이 있습니다. 도시 곳곳에 거대한 성당이 위치해 있더군요. 걸어 다닐 때면 사제복을 입은 분들도 자주 마주쳤습니다.

로마 시의 한켠에 교황청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오래된 성당이 많다는 것도, 가톨릭 신자가 많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경건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만날 때면, 여전히 조금씩은 놀랐습니다.
 
 숙소 근처의 작은 교회
ⓒ Widerstand
저 역시 로마를 여행하며 바티칸을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 시간을 내어 바티칸에 방문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금세 바티칸 박물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바티칸 박물관과 성 베드로 성당을 방문했습니다. 바티칸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 두 곳입니다. 박물관에서 성 베드로 성당에 도착하고 나니, 바티칸 시국의 거의 절반 정도를 돈 셈이 되더군요.
어쩐지 흥미가 생겨, 바티칸 시국을 한 바퀴 돌아 보았습니다. 높은 벽을 따라 걷다 보니,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이곳이 바티칸 시국입니다. 겨우 0.5㎢의 영토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죠. 세계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다스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바티칸 박물관
ⓒ Widerstand
물론 바티칸이 항상 이렇게 작은 땅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황령은 오랜 기간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를 장악한 국가였죠. 중세 유럽에서 교황이 가지고 있었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교황령'이라는 땅이 등장한 것은 756년입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로마 땅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차지합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중부의 넓은 영토를 교황에게 기증하죠.

이 '피핀의 기증'을 통해 만들어진 교황령은 교황의 힘과 함께 성장해 나갔습니다. 한때는 프랑크 왕국의 속국 취급을 받던 교황령도 곧 강성한 국가가 되었죠.

13세기 교황령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죠. 근대에 접어들며 교황의 권위는 추락했지만, 교황령의 번성은 여전했습니다.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황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납치되는 일도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침입으로 로마가 불타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황의 권위는 신성불가침에 가까웠죠. 바티칸을 무력으로 장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 Widerstand
결국 바티칸이 무너진 것은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통일 세력에게 바티칸은 가장 중요한 적대 세력이었죠. 새로운 근대국가 수립을 원하는 이탈리아에게 바티칸은 중세 구습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의미가 아니더라도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죠. 바티칸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이탈리아의 남북을 통일하려면 교황령을 정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60년, 이탈리아 통일 세력은 교황령을 공격합니다. 교황령은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프랑스는 곧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벌이느라 군대를 철수합니다. 결국 1870년, 교황령은 완전히 이탈리아의 손에 떨어집니다. 이탈리아 왕국은 그렇게 로마를 수도로 삼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근위대가 지키는 교황청
ⓒ Widerstand
1000여 년 만에 교황령은 멸망한 셈이었습니다.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과 부속 건물에만 갇혀 살게 되었죠. 이 시기를 '바티칸 유수'라 부르기도 합니다. 교황 비오 9세는 이탈리아의 국왕과 수상을 파문하고 이탈리아 왕국과 갈등을 이어갑니다. 
이탈리아 각지에 위치한 가톨릭 성당도 이탈리아 왕국의 정책에 저항하기도 했죠. 유럽의 일부 가톨릭 국가들도 교황령의 멸망을 인정하지 않고 외교 관계를 이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침입해 교황을 구출해 줄 세력은 없었습니다.

교황을 이 같은 포로 신세에서 구해준 것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였습니다. 1922년 집권한 무솔리니는 혼란스러운 이탈리아 정치를 정리하겠다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내부 정치에서도, 국제 관계에서도 교황령 문제는 해결해야 할 사안이었죠.

1926년부터 시작된 합의는 1929년 타결에 이르렀습니다.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었죠. 이 합의를 통해 성 베드로 성당을 중심으로 한 좁은 지역이 "바티칸 시국"이라는 국가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를 국가로 승인하고, 국제 분쟁에서는 중립을 지키도록 했죠.
 
 바티칸을 둘러싼 벽
ⓒ Widerstand
잘 알려져 있듯, 무솔리니는 곧 독일의 편에 서 2차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이탈리아는 졸전을 거듭했고, 무솔리니 본인도 독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게 되죠. 연합군에 밀려 도주하던 무솔리니는 게릴라에 붙잡혀 총살당합니다. 하지만 다시 세워진 이탈리아 공화국도 라테라노 조약을 인정했습니다. 바티칸 시국은 독립국가의 지위를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
ⓒ Widerstand
교황령은 한때 유럽 전체에 권력을 떨치던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티칸 시국은, 걸어서도 충분히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도시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이만큼의 땅을 지키기 위해서, 교황청은 파시스트와의 협력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이 가진 영향력을 여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교황청의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는 13억 명을 넘습니다. 교황은 여전히 이 수많은 신도들의 종교적 지도자입니다.

꼭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교황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크죠. 10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방문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났을 때, 그 모습에 위로를 받은 것은 가톨릭 신자들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 베드로 성당의 앞에는 거대한 광장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황이 직접 강복을 할 때면 이 광장이 가득하도록 세계 각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몰려듭니다.

교황령은 이제 교황과 성직자만이 거주하는 작은 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티칸 시국을 한 바퀴 돌며,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의, 교황의 영향력은 넓은 영토나 강력한 군사력에서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성 베드로 성당의 돔
ⓒ Widerstand
거대한 영토과 강한 힘을 가지고, 세속의 군주들을 위세 아래 짓누르던 중세 교황의 모습은 이제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선함과 신실함을 앞에 두고, 세상의 사람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교황의 모습이 이곳에 있습니다. 
교황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넓은 영토를 가지고 강성했던 교황은 이제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교황의 목소리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 중부를 다스리던 교황령보다는 지금의 바티칸 시국이 교황이 있기에는 더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불신자인 제가 굳이 바티칸 시국을 둘러보고 성 베드로 성당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겠지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있기에 가질 수 있는 종교의 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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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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