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음 틀리면 죽는다'... 관동대지진 이후 벌어진 비극
[조영준 기자]
▲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 1923년 9월 >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01.
1923년 9월의 일본 후쿠다 마을에 마을 청년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다. 국가를 위해 자신을 전쟁터에 내던진 것이다. 그의 부모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슬픔을 어렵게 누르고 아들의 희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자 한다. 같은 시간,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던 사와다(이우라 아라타 분) 역시 아내 시즈코(다나카 레나 분)와 함께 후쿠다 마을로 돌아온다. 재향군인회를 만들어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던 하세가와도 이 마을의 일원. 이들 모두가 마을에 모이는 사이 누마베(나가야마 에이타 분)가 이끄는 15명의 행상원이 이곳에 도착한다.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며 이름을 알린 타츠야 모리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 1923년 9월 >은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뒤 발생한 비극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일본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후쿠다 마을 사건을 기반으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관동대지진 이후 이후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죽창과 흉기로 무장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학살했던 일의 한 부분이다. 당시 후쿠다 마을에서는 그런 유언비어로 인해 일본인(후쿠다 마을 사람들)이 일본인(15명의 행상원)을 살해하는 동족상잔의 사건이 일어났으나 오랜 시간 잊혀왔다.
02.
"전쟁에 좋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아요."
영화는 희생자 무리에 해당하는 누마베를 비롯한 15명의 행상원들을 극의 처음부터 등장시키지 않는다. (중간중간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마을로 향하고 있다는 정도의 정보는 해당 신을 통해 주어진다.) 영화의 시작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가해자에 속하는 후쿠다 마을의 주민들. 감독은 러닝 타임의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마을을 구성하는 이들의 현재와 과거, 생활 모습과 서로 간의 관계를 아주 자세히 그려낸다. 그중에는 마을 강가의 나룻배를 모는 타나카(히가시데 마사히로 분)와 시즈코의 불륜을 다루는 플롯도 존재할 정도로 꽤 상세하다.
영화 전체로 봤을 때는 호흡이 늘어지기만 하고 큰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내용들이지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중 하나는 영화의 처음에서 재가 되어 돌아온 청년의 모습처럼 오랜 시간 전쟁을 겪으며 지속적으로 쌓여온 감정적 탈진 상태와 불신의 환경, 아들과 남편을 모두 떠나보내고 홀로 지내야 했던 여성들의 서사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부분은 국가나 인종을 초월해 유사한 상황에 놓인 인물이라면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 상태로 볼 수 있다.)
▲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 1923년 9월 >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두 번째 이유는 감독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타츠야 모리 감독은 '가해자가 반드시 괴물은 아니다'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 영화의 초반부에 평범한 모습을 오래 담아내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들 역시 일상에서 웃고 울고 하는 정말 보통의 사람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떤 계기를 통해 급격히 변하기 마련이고, 집단은 개인보다 그런 성향이 더욱 강해 영화의 소재로 다루고 있는 사건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실제로도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영화 후반부의 비극 속에서 드러내는 동물과도 같은 행위의 고저(高低)는 두 장면 사이의 감정적 거리를 상당히 멀게 느끼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구조는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고전적인 연기와 스타일과 더불어 다소 올드한 느낌을 느끼게 하기도 하지만, 그 간극으로 인해 관객들이 더욱 큰 충격을 받도록 만들기도 한다.
04.
"한일합병 이후 일본인은 조선인을 끊임없이 학대해 왔어."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사건이 관동대지진과 일본 내의 사건인 후쿠다 마을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단순히 일본의 역사적 사실만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다. 감독은 영화의 소재 위에서 같은 시간대에 벌어지고 있는 조선인들의 피해와 그 이전까지 받아야 했던 폭력과 슬픔을 다루고 있다. 극 중 인물들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제암리 교회 방화 사건'이 대표적이다.
▲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 1923년 9월 > 스틸컷 |
ⓒ 부산국제영화제 |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취재하는 온다 기자(마이 키류 분) 역시 이 작품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원래의 역사적 사건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이지만 소재의 참상을 더욱 강하게 각인시키고 적극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이를 맹목적으로 따르고자 하는 주민들, 그로 인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문에 싣지 않고 오히려 선전에 앞장서고자 하는 신문사 대표의 태도에 일갈한다.
더 나아가 이 인물은 일본인들의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인해 조선인인 김성령이(극 중에서 조선 사탕을 팔던 소녀다.)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하는 현장에 던져지기도 한다. 혼자서는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금방 발각이 될 테니, 함께 검문을 지나가달라던 그녀의 간절한 요청에 양손을 꼭 붙잡고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15엔 50전'을 일본어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죽창에 찔려 죽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국가와 언론의 비겁한 행태를 내부로부터 고발하며 맞서 싸우고, 힘없는 민족을 돕기 위해 몸소 나서던 인물의 모습은 반대편에 서 있는 다른 나머지 인물들과 정확히 반대되며 더욱 또렷하게 두드러진다. 그리고 여전히 아직도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로부터 도망치려는 이들의 뒷덜미를 붙잡아 주저앉힌다.
06.
이 영화는 지난 9월 1일,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정식으로 개봉되었다고 한다. 소재의 특성상 어려움을 느낄 법도 한데,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도 한다. 모리 다츠야 감독은 이 영화의 연출을 시작할 당시부터 이번 작품이 한국에서 상영되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상영에 이어 정식 개봉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나의 작품만으로 서로 간의 복잡한 이야기가 단번에 풀릴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와 언론이 먼저 나서지 못하는 이때에 슬픔과 비극이 담긴 사건을 정확히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와 용기는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 < 1923년 9월 >은 그런 항거의 정신을 담아낼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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