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영국 축구장에서 새우 샌드위치를 먹으면 안되는 이유

김식 2023. 10. 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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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랩소디가 3주 만에 돌아왔다. 양해를 구할 게 있다. 원래 오늘의 주제는 “2개의 클럽을 응원하는 사람은 가짜 팬일까 아닐까”였으나,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알아보겠다. 독자분들의 이해를 바란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플라스틱 팬(Plastic Fan)’은 잉글랜드에서 가짜 축구 팬을 의미한다. 1960년대 좋은 성적을 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쫓아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플라스틱 팬이 등장했다. 맨유에 이어 리버풀FC가 1970~80년대 자국리그와 유럽대항전에서 황금기를 보내자, 가짜 팬은 더 늘어났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플라스틱 팬의 절대적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EPL)가 출범했고, 몇 년 후 플라스틱 팬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다시 한번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클럽은 맨유였다. 맨유는 90년대 EPL의 절대 강자였다. 아울러 에릭 칸토나, 라이언 긱스, 데이비드 베컴 등이 가진 카리스마, 압도적인 실력과 멋진 외모로 인해 영국 전역에서 맨유를 응원하는 사람이 급속히 늘어났다.

1990년대 맨유는 EPL을 평정했지만, 유독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98~99시즌 맨유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지만, 주장 로이 킨과 폴 스콜스가 경고 누적으로 출전할 수 없었다. 80분 넘게 0-1로 끌려가던 맨유는 후반 추가시간에 터진 테디 셰링엄과 올레 군나르 솔샤르의 골에 힘입어, 바이에른 뮌헨을 2-1로 물리치고 극적으로 우승했다. 이로써 맨유는 31년 만에 유럽 정상에 다시 올랐고, 잉글랜드 클럽 사상 처음으로 ‘트레블’을 달성했다. 맨유 홈페이지

 
이렇게 맨유가 전국구 팀이 되면서 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자, 이에 따른 부작용도 등장했다. 새로 유입된 팬 중에 상당수가 플라스틱이었던 것이다. 1999년 퍼거슨 감독은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의 분위기에 실망했다고 밝히며, 홈 관중들이 더 큰 소리로 열성적인 응원을 보내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2000년 11월 맨유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우크라이나의 명문 클럽 디나모 키이우와 만났다. 맨유가 챔피언스리그 다음 라운드 진출을 위해서는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a must-win game).” 경기는 팽팽히 진행된 끝에 셰링엄의 골로 맨유가 1-0으로 이겼다.

하지만 경기 후 주장 로이 킨은 화가 단단히 났다. 그는 B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홈구장의 일부 팬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킨은 “맨유가 어웨이 경기를 가질 때, 원정 응원 온 팬들은 환상적이다. 하지만 홈에서 경기를 할 때 일부 관중은 경기에 관심도 없고, 응원도 안 한다. 단지 그들은 새우 샌드위치를 먹느라 바쁠 뿐이다”라고 밝혔다. 킨의 유명한 ‘새우 샌드위치’ 발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왼쪽부터 데이비드 베컴, 라이언 긱스와 로이 킨(16번). 맨유에서 8년 동안 주장을 맡았던 로이 킨은 특유의 불같은 성격과 직선적인 말투로도 유명했다. 그는 2005년 맨유가 미들즈브러에 1-4로 패했을 때, 공개적으로 팀 동료인 리오 퍼디난드, 다렌 플레처, 앨런 스미스 등을 비판했다. 맨유는 킨에게 5000 파운드의 벌금을 부여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그는 클럽을 떠나게 된다. 맨유 홈페이지


현재 평론가로 활동 중인 킨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 16강전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골을 기록할 때마다 춤을 춘 브라질 선수들과 감독을 향해 “상대 팀에 대한 예의가 없다”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았다. 당시 킨의 사이다 발언은 울적한 한국 축구팬들에게 큰 위로로 다가왔다. 스카이 스포츠 캡처

한때는 국내에도 진출했던 유통 기업 ‘마크 앤 스펜서(M&S)’가 판매하는 식료품은 영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M&S가 1981년에 개발한 새우 샌드위치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샌드위치 중 하나로, 축구장에서는 신분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영국에서도 새우는 고급 별미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M&S가 엑스(X, 옛 트위터)에서 소개하는 자사의 새우 샌드위치. 사진=M&S X


킨은 이렇게 새우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들(eaters)’과의 전쟁을 선언했고, 잉글랜드 언론은 이들을 ‘새우 샌드위치 여단(prawn sandwich brigade)’이라 칭했다. 다시 말해 새우 샌드위치 여단이란 축구에는 별 관심이 없으나, 경기장의 스카이 박스(sky box)에 앉아 접대를 즐기기 위해 경기장을 방문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따라서 이들은 플라스틱 팬이다.   

스카이 박스를 이용하려면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환대)’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일반 입장권보다 훨씬 비싼 이 티켓을 가진 관중은 여러 특혜를 누릴 수 있다. 축구를 보기에 최고의 좌석이 제공되는 것은 물론이고, 경기 중 다양한 음료와 고급 음식도 맛볼 수 있다. 기념품 판매대와 라운지 등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들은 일반 티켓을 가진 팬보다 구장에 훨씬 오래 머물 수 있는 권리도 갖는다. 구단 입장에서는 새우 샌드위치 여단이 축구에 특별한 관심을 안 보여도, 일반 티켓 소지자들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안겨주기에 이들을 환영한다.

로이 킨의 새우 샌드위치 발언이 나온 지 23년이 지났다. 그 사이 EPL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축구리그가 되었고, 맨유, 리버풀 같은 빅 클럽들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EPL 경기장은 더욱더 커지고, 현대화됐으며 입장료는 더 이상 잉글랜드의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축구장의 원래 주인이었던 노동자들이 쫓겨난 자리는 중산층과 호스피탈리티 패키지를 구입한 이들로 대체됐다. 해외에서 건너온 부자 관광객들도 이에 가세했다.

EPL에는 더 이상 로이 킨 같이 진정한 축구 선수나 팬이 지켜야 할 덕목을 저버렸을 때 직설적으로 이를 비판하는 선수가 없다. 킨의 다혈질 적인 성격은 때때로 그를 곤경에 빠트렸지만, 그는 주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지는 진정한 리더였다. 더 이상 현대 축구에 킨 같은 선수가 나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올드 팬들은 예전의 순수했던 축구를 더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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