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버틴 6사단, 허무하게 무너진 1사단... 왜 성찰은 없나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답사 여행객)]
▲ 춘천MBC 앞에 있는 춘천전투 기념비 기념상 |
ⓒ 윤태옥 |
강원도 춘천에는 한국전쟁 개전 초기 춘천전투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적지 않다. 모진교 서쪽의 5번 국도는 말고개터널을 통과해 북한강을 따라 남하한다. 말고개터널에서 500m 정도 되는 도로변에 38선 표지가 있는데 바로 그 옆에 '모진교 전적지' 표지가 있다.
이곳에서 남하하는 북한강의 동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국군은 춘천시로 진공하려는 인민군들을 막아냈다. 강의 서쪽 내륙에서는 가평으로 진격하는 인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한강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고슴도치섬을 지나 상중도가 나오는데 상중도의 동쪽에서 소양강이 북한강에 합류한다. 합류하는 두 강은 사농동(옥천포)과 우두동을 감싸고 있어 지도로 보면 이 지역은 반도처럼 보인다. 우두동의 소양강 쪽에 우두산이 있고 우두산 정상부는 전면전이 터지던 그날 국군 6사단 7연대의 관측소가 있었다.
그 중턱에 '우두산 전투 전적지'가 공원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이곳엔 우두산 전투(1950년 6월 26일)를 기리는 충렬탑이 높이 솟아 있고 그 옆의 안내표지는 6월 26일 벌어진 전투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우두동의 서쪽인 사농동의 북한강 강변에는 옥산포가 있다. 그날 포격전의 진지이기도 했고 타격목표이기도 했다.
▲ 소양교 교각의 총탄 자국 |
ⓒ 윤태옥 |
소양강이 북한강에 합류하기 직전에 소양1교와 소양2교 두 개의 다리가 가까이 놓여 있다. 상류 쪽 소양1교의 교각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탄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두꺼운 콘크리트에 깊이 파인 탄흔은 73년 전의 전쟁을 지금도 실감나게 전해준다. 이곳에서 소양감댐으로 올라가면 강변공원에서 춘천 내평전투 호국경찰추모상(춘천시 신북읍 천전리 15-4)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전투도 춘천전투의 하나다.
소양2교 남단에서 북한강을 따라 더 내려가면 춘천대교가 나오기 전에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이 있다. 무공탑과 '육이오 참전 학도병 기념탑'을 포함한 여러 개의 조형물과 설명표지가 있다. 이 가운데 포병16대대의 포격상이 내 눈에 가장 인상 깊다. 포탄을 쏘아대는 포병 옆에 지게로 포탄을 지어 나르는 민간인이 있다. 짐꾼으로 참전한 이 지역 주민들의 공을 기억하게 하는 의미 있는 대목이다.
평화공원에서 더 내려가면 의암호이고 하중도 앞에서 공지천이 합류한다. 의암호 호숫가에 춘천MBC가 있고, 그 안쪽에 춘천지구전적기념관이 있다. 기념상에는 여섯 명의 국군 장병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있다. 인민군의 선두에 섰던 자주포에 대항했던 육탄공격을 묘사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38선 일대에서 38선 표지나 평화기원 조형물을 본 적은 있어도 초기 전투 자체를 기념하는 전적비와 조형물은 춘천지역 이외엔 없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전쟁 초기 전투(6월25일~28일)에서는 춘천을 제외하고는 국군이 일방적으로 밀렸기 때문이다. 오직 춘천전투만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방어전의 전적을 내보이고 있다.
춘천전투의 주인공은 6사단이고 그 가운데서도 7연대가 중핵이었다. 2연대는 홍천에 주둔했고 예비연대인 19연대는 원주에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인 6월 19일 화천의 인민군 2사단에서 SU-76 자주포 승무원 한 명이 7연대로 귀순해왔다.
귀순자는 "원산의 인민군 포병연대가 대규모 야외훈련을 한다며 1주일간 야간행군을 해 철원-김화를 거쳐 6월 18일 밤 화천 남쪽 신포리 백사장에 도착했고 춘천을 곧 공격할 것"이라는 진술을 했다. 7연대는 다음날 밤 수색중대를 북으로 침투시켜 적정을 살폈다.
▲ 우두산 전투 전적비 |
ⓒ 윤태옥 |
최전선의 생생한 정보보고 묵살한 육군본부... 자리 지킨 김종오의 6사단
6월 21일에는 7연대장이 직접 나섰다. 간척고개에 올라 양구~오음리간 도로상에 많은 인민군과 차량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고, 38선 부근에 배치된 45mm 대전차포 2문도 눈으로 확인했다. 7연대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은 6사단장 김종오는 바로 육군본부에 심각한 남침징후라고 보고했지만, 육본 정보국은 "인민군은 절대 도발하지 않는다"며 묵살했다.
육군본부는 최전선의 생생한 정보보고를 묵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6월 24일 0시 비상령을 해제했다. 전군이 주말 외출외박을 실시했으나 춘천의 6사단 7연대는 비상령을 해제하지 않았다. 외출외박을 하기는 했지만 춘천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국방장관 신성모의 댄스파티도 6사단과 관련해서 더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6월 24일 신성모가 용산의 장교클럽 오픈을 기념하는 댄스파티에 참석하라고 6사단장 김종오도 호출했으나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남침 징후가 농후하니 주말이지만 임지를 지킨 것이다. 지극히 상식에 충실한 처신이었다.
김종오는 1950년 6월 10일 6사단장으로 부임했다. 6사단은 3개 연대가 있고 포병 1개 대대가 배속된, 편제가 제대로 갖춰진 완편사단의 하나였다. 당시 국군 8개 사단 가운데 완편사단은 4개 사단뿐이었다. 6사단은 춘천의 7연대(연대장 임부택)가 비교적 잘 갖춰진 상태였다.
2연대는 5일 전에 6사단에 배속되어 서울에서 홍천으로 이동하여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상태였다. 원주에 주둔하는 19연대는 1950년 5월 1일까지 남원에서 토벌작전을 수행하다가 원주로 막 이동을 마친 상태였다. 사단직할의 16포병대대는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만큼 훈련을 강하게 했던 부대였다고 전해진다.
▲ 춘천전투 국군-인민군 배치 상황 |
ⓒ 박종현 |
이제 6.25 개전 후 4일 동안의 춘천전투를 좇아가보자. 인민군의 주공격선은 모진교를 건너 5번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것이었다. 새벽 4시 모진교 북방의 신포리에 배치된 인민군 곡사포가 불을 뿜었다. 모진교 남단의 7연대 9중대가 집중적인 포격을 당했다. 중대장과 두 소대장이 전사했고 전사, 실종, 부상 등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5시에는 인민군 보병부대가 자주포를 앞세우고 모진교를 넘기 시작했다. 오전 9시에는 인민군이 모진교 10km 남쪽의 역골까지 진출했다.
7연대는 기습공격을 당했지만 나름 신속하게 대응했다. 5번 도로를 타고 인민군의 자주포가 남하해오자 오전 7시 15분 57mm 대전차포중대 2소대를 서원리 진지에 배치했다. 오전 7시 30분 인민군 자주포가 나타나자 곧바로 사격하여 1발을 명중시켰다. 그러나 자주포는 잠시 멈칫했을 뿐 파괴되지 않았다. 대전차포중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옥산포로 후퇴했다. 이곳에서 치열한 근접전투가 일어났다.
오전 8시 30분 6사단의 직할 16포병대대는 옥산포 진지로 출동해 105mm 곡사포 4문을 전개했다. 4문의 곡사포는 5번 도로를 따라 남하해 오는 인민군 밀집대형에 포격을 가해 상당한 피해를 입혀 남하를 저지했다. 그 다음에는 수색대가 역골의 동쪽 고지에 올라가 16포병대대의 포격을 정확하게 유도하여 인민군의 2차 공격도 무산시켰다. 이로 인해 모진교를 넘어온 인민군 주력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25일 하루 동안 역골에 발이 묶였다.
첫날 전투에서 포병의 공이 가장 컸다. 운도 좋았다. 16포병대대는 곡사포 15문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수리중인 3문을 제외하고 12문의 야포가 6.25 당일 춘천에 전부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보병 3개 연대에 포병 1개 중대씩 배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3개 중대가 춘천에 집결해 있었던 것이다.
포병16대대는 25일 야간에 진지를 소양강 남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우두동 진지에 보관하고 있는 포탄 4천 발이 문제였다. 이때 춘천농업학교, 춘천고등학교, 춘천사범학교의 학생들과 춘천제사공장의 여공들이 지원하여 포탄을 운반했다. 26일 정오까지 생명과도 같은 포탄을 모두 운반했다. 장기전이든 당장의 실전이든 군대는 물속의 고기와 같아서 직접이든 간접이든 국민들의 협조를 받을 때 전과를 더 올릴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인민군은 역골에서는 발이 묶였지만 일부는 5번 도로를 따라 개활지인 사농동의 옥산포까지 남하해 왔다. 25일 저녁에는 춘천 시내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 포병16대대의 포격상 |
ⓒ 윤태옥 |
[개전 2일차] 옥산포 기습 작전의 성공
26일이 밝았다. 원주의 19연대는 차량과 열차를 이용해서 26일 새벽까지 모두 춘천에 도착했다. 6사단장 김종오(대령)는 춘천전투 현장을 방문해 전황을 파악했다. 해 뜰 무렵 인민군은 옥산포 방향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인민군 선두는 옥산포를 완전 점령하고 봉의산과 춘천 시내에 포격을 가하고 있었다.
7연대는 오전 8시 옥산포를 기습하기로 했다. 1대대가 은밀하게 접근했다가 10시 30분 포병의 맹렬한 지원사격을 받으며 1.5km 거리를 전속력으로 질주하여 옥산포로 돌진했다. 측면에서 들이닥친 1대대의 기습공격에 인민군은 부대가 일시적으로 흩어지며 북쪽으로 2.5km를 후퇴했다. 국군이 역습에 성공한 것이다.
인민군이 다시 전투에 투입된 시간은 오후 2시경. 1대대는 2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과 한 시간 가까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아군의 손실을 우려해 이날 저녁 진지를 남쪽으로 재배치했다.
26일까지 6사단은 소양강 이북의 공간만 내주면서 막아냈다. 6사단은 지휘소를 우두산에서 학곡리로 옮겼고, 반면에 인민군은 군단 전술지휘소를 인람리까지 남하시켜 총공세를 준비했다. 병력과 화력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개전 3일차] 후퇴 지시
27일, 개전 3일차가 됐다. 이날 오전 7시 30분 기적적으로 육군본부-6사단 통신망이 3일 만에 가동되어 육군본부 참모부과 6사단장의 통화가 이루어졌다. 육본은 전체 전선이 크게 악화된 상황을 설명하고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선을 따라 지연전을 하라는, 쉽게 말해 후퇴하라는 작전지시를 했다. 이에 따라 6사단장은 춘천 남부의 원창고개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날 새벽부터 봉의산과 춘천시내에 포격을 가해오던 인민군은 정오경에 자주포 2대를 소양교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로 보병부대가 건너왔다. 소양강 제방에 배치되어 있던 7연대는 인민군의 자주포에 대항할 무기가 없어 고전을 면치 못했다. 7연대장은 오후 1시 봉의산 관측소를 폐쇄하고 후퇴했다.
7연대는 후평동과 학곡리를 거쳐 오후 6시경 원창고개에 연대 관측소를 새로 설치했다. 춘천시내에서 시가전을 벌이며 지연전투를 펼치던 모든 부대는 오후 늦게부터 춘천시내에서 철수하여 원창고개 방어선으로 이동했다.
▲ 춘천전투의 마지막 방어선 원창고개의 현재 모습. |
ⓒ 윤태옥 |
28일이 됐다. 3일간 춘천을 사수하던 6사단은 원창고개에 춘천 최후의 방어선을 준비했다. 인민군의 포격은 원창고개에 집중되었고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고전이 계속됐다. 정오가 되면서 모래재(서울양양고속도로 조양IC 남측)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로써 춘천에서의 전투는 끝났다.
춘천전투의 핵심은 인민군 2군단을 국군 6사단이 춘천지역에서 3일 동안 막아냈다는 점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사는 한국전쟁을 초기 전투(6.25~28), 한강방어 전투(6.28~7.3), 지연 작전(7.1~31), 낙동강 방어 전투(8.1~9.23), 인천상륙작전(9.15~18), 서울탈환작전(9.16~28) 등으로 구분한다.
6사단조차 춘천에서 뚫렸으면 인민군 2사단은 가평을 거쳐 수원을 측면에서 공격했고, 그러면 수도권의 국군 전체의 퇴로가 막히면서 전세는 최악 중 최악이 되었을 것이다. 한강방어 전투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이고, 미군이 신속히 참전했어도 낙동강까지의 지연작전은 한달이 아니라 1~2주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낙동강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 어느 한 곳을 돌파했더라면 부산은 '부산 철수', 곧 보트피플의 아수라장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6사단이 춘천에서 3일을 막아낸 것은 나라를 구한 전투라는 수사가 기념식장의 과장만은 아닌 것이다.
이런 평가는 국내의 전사 연구에 앞서 적군에서 먼저 나왔다. 김일성은 춘천을 적시에 돌파하지 못한 것을 질책해 동북항일연군 동지였던 2군단장 김광협과, 소련군 출신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최춘국을 전쟁 중에 교체해 버렸다. 당시는 물론이고 전쟁 이후에도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우리에게 제대로 인식되진 않았다.
춘천전투에 대한 우리 측의 평가를 결정적으로 바꾼 계기는 훗날 소련과의 수교 이후 소련에서 왔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가 소련의 기밀해제 문서에서 확인한 바, 북한의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가 "북한군이 춘천지역에서 3일간 발이 묶이며 전체적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보고했던 것이다. 이 보고서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1980년대 초 '춘천대첩'이라는 찬사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2003년부터 국방부와 육군 2군단이 춘천대첩 기념행사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
백선엽의 1사단은 왜 허무하게 무너졌나... 흔적 없는 반성과 성찰
춘천의 여러 전적지를 답사하면서 나는 한 가지 인색한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한국전쟁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김일성의 죄업을 평가하고 단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통제하는 변수가 아닌 것이 현실이다. 그에 반해 성찰이란 맥락에서 내부로 향하는 첫 번째 질문은 왜 북한의 남침에 버금가는 북진통일 전쟁을 준비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과 국방장관과 총참모장 등 군의 통수권과 그 집행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앞의 글에서 언급했었다.
두 번째로는 전선의 지휘관들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바로 춘천에서 던지게 된다. 그날 그 시간, 동일한 여건에서 국군 6사단은 인민군 2군단을 3일간 막아냈는데 다른 사단들은 왜 그렇게 허무하리만큼 무너졌을까. 여러 사단 가운데서도 편제를 제대로 갖춘 완편사단이었던 1사단(백선엽) 7사단(유재흥) 수도사단(송요찬)만큼은 이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구체적으로 우리 정부는, 우리 군은 어떻게 성찰하고 반성했는지 궁금하다. 국방부가 펴낸 1천 쪽에 달하는 공간사(公刊史)를 훑어보았지만 내 독해력이 부실했는지 6사단의 초기전투와 대비시키는 패전에 대한 절실한 성찰은 없는 것 같다.
혹시라도 '저 놈 나쁜 놈'이란 프레임을 앞세워 자신에 대한 성찰은 슬그머니 덮어버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은 한국전쟁 답사여행 전반에 걸쳐서 변함없이 계속되고 글로 정리하는 지금도 그렇다. 성찰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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