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이 나라보다 4배 더 많은 사람이 죽는 이유 [이봉렬 in 싱가포르]
[이봉렬 기자]
▲ <오마이뉴스>는 일터에서 사망한 노동자들을 기록하는 기사 "이달의 기업살인"을 3년 넘게 연재하고 있습니다. |
ⓒ 오마이뉴스 |
2020년 8월 이후 <오마이뉴스>에는 특별한 기사가 매달 하나씩 올라옵니다. 한 해 약 2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지만 매일같이 발생하는 그 죽음에 사람들이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동건강연대가 작성하는 '이달의 기업살인'(https://omn.kr/1pufk) 연재 기사입니다. "노동자의 '조용한 죽음'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책임을 묻기 위한 밑거름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로 시작된 이 연재는 벌써 41화를 넘기고 있습니다.
연재의 첫 기사 제목은 "7월에도 56명이 퇴근하지 못했습니다"(https://omn.kr/1rfh4)입니다. 2020년 7월 한달 동안 56명의 노동자가 일하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3년이 지난 올해 9월에 나온 마흔 번째 기사의 제목은 "8월 세상 떠난 노동자 73명... 비슷한 죽음이 반복되다"(https://omn.kr/25jit)입니다. 일하다 죽는 노동자들의 수를 줄여 보겠다며 3년 넘게 매달 기사를 쓰고 있는데 오히려 사망자 수는 더 늘었습니다.
해당 기사는 동일 사업장에서 '같은 죽음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e편한세상 건설사인 디엘이앤씨에서는 8월 한 달 간 2명의 노동자가 별개의 사고로 숨졌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디엘이앤씨에서만 8명의 노동자가 사고로 사망했다."
"8월 10일, SPC 계열사인 샤니 제빵공장에서는 노동자 한 명이 설비에 끼여 병원 치료 이틀 만에 사망했다. 지난해 10월에는 SPC의 또다른 계열사 SPL 평택공장에서 샌드위치를 만들던 노동자가 소스 교반기에 끼여 사망했던 사고가 있었다."
작업장에서 노동자가 일하다가 죽는 사고가 발생하면 회사에서 원인 파악을 하고 다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하는 게 상식일 것 같은데, 디엘이앤씨나 샤니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안전시설에 투자하는 것보단 사람이 죽어 가는 걸 방치하는 게 회사에 더 이익이 된다고 판단한 게 아닐까요? 작업장에서 사람이 죽을 경우 작업장을 운영하지 못하게 법과 제도가 되어 있다면 과연 그렇게 반복되는 죽음이 계속될까요?
▲ 싱가포르의 산업재해 벌점 제도(Demerit Point System) 누적점수에 따라 고용이 제한됩니다. |
ⓒ 싱가포르 노동부 |
예를 들어 안전 점검에서 지적 사항이 나와 벌금을 부여하면 1점입니다. 건설 현장이 위험에 노출된 상태라면 부분적으로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는데 이런 경우는 5점, 개선이 될 때까지 전체적으로 작업 중지 명령을 받으면 10점입니다. 노동자 한 명이 중상 또는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25점, 두 명 이상의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50점이 부여됩니다. 이 벌점은 해당 건설현장의 주계약자와 하청업체 모두에게 부여됩니다.
한 업체가 18개월 안에 받은 누적 점수가 25점이 넘으면 정부의 제재가 가해집니다. 25점이 넘으면 3개월 동안 새로운 노동자를 채용하지 못하고, 50점이 넘으면 6개월 동안, 75점이 넘으면 1년, 100점이 넘으면 2년 동안 채용이 금지됩니다. 125점이 넘으면 채용을 못할 뿐 아니라 기존에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재계약도 2년 동안 금지됩니다.
건설 현장에서 일정기간 채용 또는 재계약을 못 하게 하는 게 무슨 큰 제재인가 생각하겠지만 싱가포르의 인력 상황을 이해하면 이게 얼마나 큰 제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도시국가인 싱가포르는 인구가 600만 명 정도 됩니다. 이 중 취업 비자를 받아 일하러 온 이주노동자 수는 150만 명 정도로 25%, 즉 넷 중에 한 명은 이주노동자입니다. 인구가 적다 보니 이주노동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경제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는 겁니다. 한국의 경우 이주노동자 수가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전체 취업자의 3% 수준입니다.
이주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취업비자는 일반적으로 2년에 한 번씩 갱신을 해야 합니다. 갱신이 되지 않으면 30일 이내에 싱가포르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건설 현장에는 매달 일정 수의 새로운 노동자를 채용하거나 갱신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벌점이 쌓여 채용이나 갱신이 되지 않으면 사실상 노동자 수가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해 건설 현장을 운영할 수 없게 됩니다. 산업 재해가 발생해 벌점이 쌓이면 회사 문을 닫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벌점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채용하지 못하게 제재하는 것 외에도 2006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기업감시(BUS)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안전사고마다 벌점을 매기는 건 같은데 벌점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안전보건 관리시스템을 마련할 때까지 관급공사 수주를 제한하고 민간공사 입찰에도 불이익을 줍니다.
작업장 안전 더 악화될지도
효과가 있다고 판단한 싱가포르 정부는 올해 10월부터 건설 현장뿐만 아니라 모든 제조 기업에도 동일한 벌점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제조 기업 중에는 노동자 수가 천 명이 넘는 대공장이 많고, 사망 사고뿐 아니라 공장 내부에 안전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도 벌점이 부과되기 때문에 기업들이 안전 관리에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금방 기준 점수를 넘길 가능성이 큽니다.
▲ 싱가포르는 안전하고 건강한 일터 만들기 프로젝트인 작업장 안전·보건(WSH)을 통해 산업재해 사망자 수를 세게 최저 수준으로 끌어 내렸습니다. |
ⓒ 싱가포르 노동부 |
산업안전에 대한 이러한 노력은 2004년 4.9였던 싱가포르의 산재 십만 명당 치명률을 2021년 1.1로 낮췄습니다. 2021년 한국의 치명률은 4.3으로 20년 전 싱가포르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현재 한국 노동자들은 싱가포르에 비해 4배 가까이 더 일하다 죽거나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이마저도 2028년까지 1.0 이하로 낮추겠다는 작업장 안전·보건(WSH) 2028 계획을 발표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보다 4배 더 많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거나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고 있는 우리나라 실정을 앞에 두고 윤석열 정부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까요? 지난해 5월, 언론들은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국정과제 이행계획서'에 중대재해처벌법 법령을 2024년에 개정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중대재해 사망사고 시 사업자에게 책임을 묻고 처벌하는 현행법을 경영계의 요구대로 완화하겠다는 겁니다.
▲ 고용부는 중대재해처벌법령을 개선하겠다며 TF를 구성했습니다.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될 거라는 게 노동계의 우려입니다. |
ⓒ 고용노동부 |
다만 여소야대 구조 속에서 법 개정은 어려울 것 같아서 2024년 총선이 끝난 후로 개정 시점을 잡았다는 듯합니다. 내년 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한다면 안 그래도 불안한 작업장의 안전이 더 악화될지도 모릅니다.
▲ 우리나라 쌍용건설이 세운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건축물 마리나베이샌즈. |
ⓒ 이봉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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