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탕서 냉탕으로…K배터리 ‘겨울이 온다’
국내 2차전지 셀 제조 업체(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수익성에 빨간불이 켜졌다. 2차전지 공급 과잉에 허덕이는 중국이 글로벌 산업 생태계를 교란 중인 가운데 최근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론이 확산 중이다. 2차전지 핵심 원료인 리튬 가격마저 뚝뚝 떨어지자 주요 원료 금속 가격에 배터리 판매 가격을 연동한 국내 2차전지 3사를 향한 우려 섞인 시선이 팽배하다.
리튬 가격도 연일 하락세
최근 글로벌 2차전지 산업계에 부정적인 소식이 잇따른다.
무엇보다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유럽과 미국에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전기차 속도 조절론에 군불을 때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지난 9월 20일(현지 시간) 내연기관차 신차 판매 금지 시작 시기를 기존 2030년에서 2035년으로 5년 미루기로 했다. 2020년 11월 내연기관차 신차 판매 금지 일정을 기존 2035년에서 2030년으로 앞당겼는데, 약 2년 만에 이를 되돌린 것. 중고차의 경우 휘발유차와 경유차를 거래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은 기후변화 대응 정책 조정 방안도 발표했다. 이에 앞서 유럽연합(EU) 의회는 2035년 이후 내연기관차를 못 팔도록 정했는데 지난 3월 합성 연료를 쓰는 내연기관차는 계속 팔 수 있도록 예외 규정을 뒀다. 이탈리아에서는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가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는 유럽의 자살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내년 대선을 앞둔 미국에서도 전기차 관련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정책을 비판하며 파업 중인 주요 자동차 업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세를 결집 중이다. 미국 3대 자동차 제조사 포드·제너럴모터스(GM)·스텔란티스를 상대로 파업 중인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은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외에 전기차 생산 확대로 초래될 고용 불안 해결을 요구한다.
여러 국가에서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론에 힘이 실리는 것은 선거를 앞둔 정치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지만 불안 심리 기저에는 일자리 감소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부품 수가 훨씬 적다. 전동화 속도가 가팔라질수록 기존 내연기관 밸류체인에 속한 근로자의 고용 불안 우려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2차전지의 주요 원료 중 하나인 리튬 가격은 연일 뚝뚝 떨어지고 있다. 전기차 수요 둔화에 중국발 2차전지 공급 과잉 우려가 겹친 탓이다. 한국자원정보서비스(KOMIS)에 따르면 지난 9월 26일 기준 탄산리튬 1㎏ 가격은 전 거래일 대비 보합세로 153.5위안에 거래됐다. 탄산리튬은 주로 전기차용 인산철(LFP) 배터리에 쓰인다. 탄산리튬 가격은 지난해 11월 15일 578.5위안으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떨어지고 있다. 국내 2차전지 기업의 주력인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에 들어가는 수산화리튬 가격의 최근 추세도 다르지 않다. 이외 2차전지 광물인 니켈, 코발트, 망간 등도 올 들어 가격이 줄줄이 하락세다.
상황에 따라 주요 원자재 가격 하락은 2차전지 업체에 독이 될 수도 득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부정적인 측면은 2차전지 판매 가격 하락이다. 2차전지 업체는 완성차 업체와 맺은 장기 공급 계약에서 서로 연동된 원자재 가격과 2차전지 판매 가격이 사전에 약속한 범위를 벗어날 경우 가격 협상을 다시 하도록 했다. 원자재 가격이 오를 때는 기존 계약이 완성차 업체에 불리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완성차 회사는 원자재 가격 하락을 이유로 배터리 단가 인하를 단단히 벼르고 있다. 이는 국내 2차전지 업체의 수익성 악화 요인으로 작용한다.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 통상 3~6개월 시차를 두고 양극재부터 2차전지 셀까지 순차적으로 판가가 하락하는 구조다.
반면, 2차전지업계에서는 이를 마냥 부정적으로 봐선 안 된다는 주장을 편다. 중장기적으로는 전기차 침투율 증가에 기여할 것이라는 논리다. 예를 들어 100원에 팔던 걸 80원, 90원에 팔더라도 가격이 싸진 만큼 수요가 늘어나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호재라는 주장이다.
일견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작금의 전기차 시장 상황에 비춰 설득력이 낮다는 시각이 맞선다. 2차전지 판매가 하락이 전기차 침투율 확대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전기차 시장 소비자들이 가격에 매우 탄력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돼야 한다. 그래야 판매 가격 하락에 따른 손실분을 물량 증가로 일정 수준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동차업계는 보조금 축소·폐지와 여전히 부족한 전기차 충전 인프라로 당분간 전기차 시장이 ‘캐즘(주류로 확대되기 전 단절 구간)’의 덫에 갇힐 것으로 본다. 시장조사 업체 모터인테리전스에 따르면 올 상반기 미국 전기차 판매량은 1년 전보다 50% 늘었지만 증가율은 곤두박질쳤다. 중국 역시 올 상반기 기준 전기차 판매량은 1년 전보다 32% 늘었지만 지난해보다 성장세가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문학훈 오산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전기차는 기술적 이슈가 많다 보니 살 만한 사람은 다 샀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 진단한다.
SK온, 영업익 흑자전환 미뤄질 듯
사정이 이렇자 2차전지 셀 제조 업체를 바라보는 불안한 시선이 확산한다.
주요 자동차 제조 업체가 연이어 전기차 감산에 나서자 LG에너지솔루션 폴란드 공장 가동률이 하락 중이다. 유럽 전기차 점유율 1위인 폭스바겐의 전기차 감산으로 일부 생산라인 가동률을 하향 조정한 결과다. 폭스바겐은 지난 6월부터 독일의 엠덴(Emden) 전기차 공장에서 감산을 단행한 데 이어 최대 공장인 츠비카우(Zwickau)에서는 감원을 준비하고 있다. 전혜영 다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가동률 회복 시점은 정확하게 예상할 수 없으나 일부 라인은 연말까지 (가동률 하락이) 지속될 것”으로 우려했다.
후발 주자 SK온의 영업이익 흑자전환 시점은 자꾸만 미뤄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당초 2022년 하반기 중 SK온의 영업이익 흑자전환을 목표로 했다. 그러던 중 유례없는 인플레이션과 미국의 강력한 긴축 기조가 맞물리면서 기존 전망은 뒤집혔다. 김준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지난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올해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기준 흑자를 달성하고 내년 영업이익 흑자를 기록하겠다”고 밝혔다. EBITDA는 영업이익(EBIT)에 감가상각비용을 더한 개념이다. 2차전지 같은 대규모 장치 산업에서는 설비 투자에 따른 막대한 상각비용이 소요되므로 이 비용을 더한 EBITDA를 실질적인 현금흐름의 잣대로 삼는다.
특히 SK온은 올 상반기 국내 2차전지 셀 메이커 가운데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을 끌어왔다. 올 상반기 SK온은 8조원이 넘는 자금을 조달했지만 투자자에게 연 7.5%의 수익률(IRR·한투PE)을 보장해야 하며 가까운 시기에 IPO까지 성사시켜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최근 2차전지 산업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SK온에 돈을 댄 재무적 투자자 사이에서는 우려 섞인 분위기도 감돈다. 금융권 관계자는 “SK온은 영업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현금흐름이 전무한 상태에서 대규모 투자가 진행됐던 터라 재무 구조 관리의 필요성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라고 귀띔했다. 재계 관계자는 “SK온의 공격적인 자금 조달로 모회사 SK이노베이션 설비 투자 여력에도 제한이 따르는 상황”이라며 “오너가인 최재원 수석 부회장이 모회사 김준 부회장에게 아쉬운 요청을 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둘 사이 관계도 다소 껄끄러운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보수적인 설비 투자로 잘 알려진 삼성SDI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다. 삼성SDI는 영업 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 내에서 투자를 진행하는 기조를 줄곧 유지해왔다는 평가다. 김지산 키움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삼성SDI에 대해 “P5 등 프리미엄 모델 위주로 대응하고 있어 경기 둔화 영향에서 한발 비켜서 있다”며 “P5 배터리 비중이 3분기 50%를 넘어서면서 수익성이 향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29호 (2023.10.11~2023.10.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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