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대형 M&A… 갈 길 먼 JY ‘뉴삼성’
10월 27일이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취임 1주년을 맞는다. ‘이재용 회장’ 시대 1년을 맞아 재계는 삼성전자 리더십이 새로운 시험대에 섰다고 바라본다. 경기 침체 우려에 따른 반도체 불황으로 재계 1위 삼성전자가 실적 부진에 허덕이는 가운데, 이재용 회장을 비롯한 삼성 경영진을 바라보는 시각도 예전 같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변혁적 리더십 보일 때
이재용 회장 앞에는 선대 회장을 넘어 ‘뉴삼성’의 틀을 닦아야 하는 막중한 과제가 놓여 있다. 다만, 회장 취임 이후 1년이 지난 현재까지 선대 회장의 경영 철학과 차별화되는 리더십은 아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삼성 지배구조 관련, 이재용 회장에게 주어진 숙제는 한둘이 아니다.
첫째 이사회 중심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이다. 이재용 회장이 2020년 5월 ‘4세 경영’ 포기를 공식화한 지 3년 5개월여 지났지만 아직까지 ‘JY식 경영 체제’의 뚜렷한 밑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문경영인 중심 이사회 체제로 큰 줄기는 잡혔다. 다만, 현재 삼성의 리더십은 강력한 1인 오너 체제에서 이사회 중심 집단 의사 결정 체제로 형식적, 질적 변화를 맞은 가운데 과도기적 단계에 놓여 있다는 진단이다. 사내이사로 이사회에 이름을 올린 삼성전자 전문경영인이 적지 않지만 현 삼성 경영진의 ‘변혁적 리더십’은 선대 회장 때에 비춰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다.
리더십 공백 징후는 곳곳에서 목격된다. 삼성전자의 대규모 M&A는 2017년 하만(Harman)을 끝으로 사실상 멈췄다. 최근 수년간 IR과 기자간담회 등 공식석상에서 삼성 경영진은 ‘유의미한 M&A’를 수차례 언급했지만 현재까지 감감무소식이다. 그사이 세계 반도체 산업 판도는 파운드리와 팹리스(Fabless) 또는 팹라이트(Fablite) 모델로 변모하면서 종합반도체기업(IDM)인 삼성전자에 매우 불리한 구도가 됐다. 삼성의 주력인 메모리 시장은 표준화된 대량 생산 체제를 기반으로 한다. 최근에는 반도체가 적용되는 IT 기기 스펙트럼이 넓어지면서 표준화된 생산능력으로는 특화 수요에 대응하기 힘들어졌다.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 전문경영인의 ‘실기(失期)’를 지적하기도 한다. 총수 일가가 승계의 정당성을 집중적으로 견제받을 때, 삼성 CEO들은 총수 부재에 따른 경영 공백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한계를 연일 부각했다. 재계 관계자는 “우여곡절 끝에 이재용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했지만 법적 리스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 등기이사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고 그렇다면 그 공백을 삼성의 전문경영인들이 메워줘야 한다”며 “하지만 삼성 CEO들이 주도적으로 대형 M&A 등 의사 결정을 주도한다면 이는 앞서 ‘전문경영인 체제의 한계’를 강조했던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지적한다. 아직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 의혹 관련 재판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문경영인이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것으로 외부에 비춰질 경우 자칫 재판에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삼성그룹 2인자 정현호 부회장이 이끄는 사업지원 TF를 향한 책임론도 대두된다. 과거 미전실에 비해 권한과 조직이 대폭 축소된 데다 이사회에 힘이 실린 구도에서 의사 결정 전면에 나서기 힘든 점을 고려해도 그간의 성과는 초라하다는 게 삼성 안팎의 평가다. 결국 이재용 회장이 향후 여론을 살펴 내년 3월 정기 주총에서 등기이사로 복귀해 사내이사로 이사회에 참여하되 이사회 의장은 사외이사에 맡겨 독립적인 의사 결정을 최대한 보장하는 식으로 책임 경영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대 회장 때와 구분되는 새 컨트롤타워 구축도 이재용 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로 지목된다. 현재 삼성은 사업 부문별 3개 TF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컨트롤타워 폐지 이후 계열사 간 자원 재배치·조정 등 통합(Integration) 기능이 사실상 실종됐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런 이유로 권한의 적절한 분산과 전략 기능에 집중한 콤팩트한 조직을 전제로 컨트롤타워 구축을 다각도로 논의해야 할 때라는 진단이다.
‘1인 4역’ 한종희 부회장
‘포스트 한종희’ 육성 관건
삼성전자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권한과 역할이 집중된 인물은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이다. 한 부회장의 공식 직함은 DX부문 경영전반총괄이다. DX는 가전과 스마트폰 사업을 아우른다. 기존에는 CE(가전)와 IM(IT & Mobile)으로 구분돼 있었으나 2021년 말 조직 개편에서 두 개 사업부를 DX부문으로 통합하고 무선사업부를 MX사업부로 변경했다. 이때 한 부회장이 DX부문장 겸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영상디스플레이(VD)사업부장을 겸직하게 됐다. 1년여 뒤 이재승 생활가전(CE)사업부장마저 돌연 사의를 밝혀 한 부회장은 CE사업부장까지 겸직하고 있다. 정리하면, 한 부회장은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DX부문을 총괄하는 동시에 2개 사업부를 이끌면서 사법 리스크가 남아 있는 이재용 회장을 대신해 각종 대외 활동에도 나서고 있다. 사실상 1인 4역을 맡고 있는 셈이다.
한 부회장 1인이 DX부문 전반을 총괄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각 사업부의 세세한 전략까지 도맡다 보니 의사 결정에 병목 현상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시선이 제기된다. 심지어 가전사업에서 경쟁사와 차별화되는 비전이 보이지 않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최근 가전사업부문에서 LG전자가 앞서 가고 삼성이 쫓아가는 듯한 구도가 몇 차례 보인 것이 단적인 예다. 과거 한 부회장이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시절 CES 2020에서 “OLED TV는 영원히 안 한다”고 공언했지만 TV 시장 패권은 결국 OLED로 넘어가고 있다. 삼성전자로선 자존심을 단단히 구겼다.
삼성전자 안팎에서는 ‘포스트 한종희’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전자에서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출신은 대체로 승진 가도를 달렸다. 과거 최지성 부회장, 윤부근 부회장, 김현석 전 사장 등이 모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출신이다. 다만, 현재 한 부회장 뒤를 이을 차기 부회장 후보감이 딱히 눈에 띄는 인물이 없다. 한 부회장이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뿐 아니라 생활가전사업부장마저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12월 초 DX부문 인사에서 차기 부회장 후보군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관측하는 가운데 한 부회장의 인재 육성에 관한 리더십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계현, HBM·파운드리 부진
수율 관련 평판 리스크 극복 숙제
경계현 사장은 삼성전자 수뇌부 가운데 가장 고민이 깊은 인물일 듯싶다. 반도체 업황이 바닥이 긴 ‘나이키’ 형태를 띨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하면서 DS부문의 연내 흑자전환은 사실상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일각에서는 연말 인사에서 교체 가능성이 조심스레 거론된다.
지금까지 성과만 놓고 보면 경 사장 입장에서는 아쉬운 대목이 많다. 최근 메모리 산업은 고부가가치 AI용 HBM으로 패권의 무게추가 옮겨 가는 중이다. 현재까지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다소 앞선 구도라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어 보인다. HBM은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 순으로 개발돼왔다. SK하이닉스는 4세대 제품인 HBM3 양산에 성공했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HBM 최대 고객사인 엔비디아로부터 수주를 늘리는 데 애를 먹는 것으로 알려진다. 대외적으로는 삼성전자가 엔비디아에 상당 규모의 HBM3 물량을 수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계약 규모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반도체업계에서는 삼성의 HBM이 수율과 발열 등 이슈로 엔비디아에 마뜩잖은 평가를 받은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존재한다. 이는 최근 반도체 장비 업체발 수주 공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미반도체를 비롯 SK하이닉스에 HBM 관련 장비를 공급하는 업체에서는 수백억원대 수주 공시가 속속 나온다. 반도체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빠듯한 곳간 사정에도 불구하고 엔비디아로부터 받은 일부 선급금으로 HBM 관련 설비 투자에 나선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에 장비를 공급하는 업체에서는 HBM 관련 대규모 수주 공시가 거의 없다. 다만, 삼성전자는 파운드리와 패키징 역량 등에선 SK하이닉스 대비 비교 우위에 있어 추후 고객사 확대로 반전을 노린다.
메모리 세계 1위를 유지하는 가운데 파운드리와 시스템 반도체부문에서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점은 경 사장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한다. 당장 삼성전자는 파운드리부문에서 2나노 공정 도입이 대만 TSMC와 유의미한 수준에서 격차를 줄일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경 사장이 “5년 안에 TSMC를 따라잡겠다”고 공언한 이유도 초미세 공정에서 TSMC를 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삼성의 파운드리를 여전히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아직 삼성전자가 대형 고객사 반도체 위탁생산 물량을 수주한 사례가 외부에 알려진 적은 없다. 삼성전자는 공정별 매출을 전혀 발표하지 않는 데다 수율 개선 정도에 대해서도 모호한 표현으로 일관한다. 삼성의 2.5D 패키징 기술인 ‘아이큐브8’을 두고도 대형 고객사가 단기간에 채용하기 힘들다는 우려가 나온다. 아직 트랙레코드가 없는 기술을 주요 고객사가 먼저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에 삼성전자는 시스템LSI사업부의 제품부터 선단 기술을 적용해 트랙레코드를 확보한 뒤 퀄컴, 엔비디아 등 대형 외부 고객사를 유치하는 전략을 밟을 것으로 관측된다.
시스템 반도체는 삼성전자의 자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인 엑시노스의 성과가 관건이다. AP는 ‘스마트폰의 두뇌’ 기능을 하는 반도체다. 업계에서는 내년 초 삼성이 갤럭시 S24 시리즈를 시작으로 엑시노스를 다시 활용할 것으로 본다.
갤럭시 ‘아재폰’ 이미지 불식 과제
반도체사업 부진으로 삼성전자 MX사업부 위상은 과거와 천양지차다. 삼성전자 MX사업부는 올해 갤럭시 S23 시리즈 판매 호조로 반도체부문의 대규모 적자를 상당 부분 상쇄했다.
자연스레 노태문 MX사업부장(사장)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노 사장은 MX사업부장 외에 디자인경영센터장을 겸직한다. 디자인경영센터는 UX(사용자 경험) 디자인부터 차세대 디자인까지 삼성전자 세트부문 디자인을 총괄한다. 사업부장이 디자인경영센터장을 겸직한 것은 노 사장이 처음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디자인경영센터장을 겸직한 사업부장은 대체로 승승장구했다. 2009년에는 당시 디지털미디어총괄을 맡은 최지성 사장이, 윤부근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이 각각 디자인센터장을 겸직했다.
노태문 사장은 MX사업부 리더로 스마트폰 점유율 세계 1위를 사수하는 가운데 애플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비교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갈급한 과제다.
애플과 OS 경쟁에서는 열위였으나 폼팩터 경쟁에서는 삼성이 승기를 잡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삼성은 폴더블과 플립 등 다양한 폼팩터를 무기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폼팩터 혁신에서 한발 앞섰지만 결코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무엇보다 젊은 층의 애플 아이폰 선호 현상에 대한 삼성 내부 위기의식이 큰 만큼 이런 우려를 불식하는 것이 간단치 않은 과제다. 삼성 안팎에서는 젊은 층의 아이폰 선호 현상에 대해 경영진이 안일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크다. 지난 8월 삼성전자 DX부문 소통을 위한 내부 행사에서는 한 임원이 “아이폰 인기는 10대들의 막연한 선망 덕분이다. 성인이 되면 갤럭시를 쓰는 만큼 아직 희망이 있다”고 언급한 사실이 익명 앱인 블라인드를 통해 외부로 알려져 입길에 올랐다. 이에 노 사장은 폴더블 대중화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확장현실(XR), 6G 등 차세대 제품 개발에 주력한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29호 (2023.10.11~2023.10.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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