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의 할리우드 정착 도운 최고의 파트너
[양형석 기자]
1990년대 중반 아시아 영화계를 주름 잡던 홍콩영화들이 침체에 빠지기 시작한 후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를 풍미했던 스타 배우들은 대거 할리우드에 도전장을 던졌다. '영원한 따거' 주윤발은 1998년 <리플레이스먼트 킬러>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후 <애나 앤드 킹>,<반탕승>,<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등에 출연했지만 썩 만족스러운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급기야 <드래곤볼 에볼루션>에서는 무천도사를 연기하기도 했다.
고 이소룡과 성룡을 잇는 1990년대 최고의 액션배우 이연걸은 1998년 <리썰웨폰 4>에서 악역을 맡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했고 2000년 <로미오 머스트 다이>를 흥행시키며 할리우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듯 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이연걸에게 대부분 별다른 연기가 필요 없는 무술고수 역할만 맡겼고 결국 현지관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되진 못했다. 주윤발과 이연걸 모두 현지적응(?)을 도울 좋은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 1998년에 개봉한 <러시 아워>는 제작비의 7배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제작사와 투자자에 큰 이익을 안겨 줬다. |
ⓒ 뉴 라인 시네마 |
의외로(?) 종교에 진심인 수다쟁이 전문 배우
1972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크리스 터커는 코미디언 출신으로 20대 초반 드라마를 통해 데뷔했다. 이후 코미디와 범죄 스릴러 등 여러 장르의 영화에 출연한 터커는 1996년 <펄프 픽션>으로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과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차기작 <재키 브라운>에 캐스팅됐다. 터커는 <재키 브라운>에서 사무엘 L.잭슨이 연기한 오델의 부하 보몬트 역을 맡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7년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에서 인류 연방에서 가장 섹시한 남성임을 자처하는 유명 라디오 DJ 루비를 연기한 터커는 같은 해 <머니 토크>에서 찰리 쉰과 호흡을 맞췄다. 그리고 터커는 1998년 흑인형사와 동양인 형사가 콤비를 이뤄 사건을 해결하는 코믹액션 영화 <러시 아워>를 통해 할리우드에서는 신예에 가까웠지만 홍콩영화계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액션배우 성룡을 만났다.
성룡과 터커가 안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환상의 케미를 발휘한 <러시 아워>는 33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세계적으로 2억4400만 달러라는 기대 이상의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러시 아워>는 할리우드에서 확실한 대표작이 없었던 성룡은 물론이고 조연 이미지가 강했던 터커에게도 확실한 대표작이 됐고 2001년 2편, 2007년 3편까지 제작되면서 도합 8억49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러시 아워> 시리즈를 끝낸 후 배우로서 활동이 뜸했던 터커는 2013년 제니퍼 로렌스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겼던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출연했다. 터커가 연기한 패트릭(브래들리 쿠퍼 분)의 정신병원 친구 대니니는 번번이 정신병원에서 탈주를 감행하다가 잡혀서 다시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대니는 자신의 입원치료를 진단했던 담당의사가 면허 취소로 구속되면서 정신병원에서 풀려나게 된다.
<러시 아워> 시리즈에서 보여준 유쾌하고 거침없는 이미지와 달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터커는 아이스 큐브와 1995년에 출연했던 코미디 영화 <프라이데이>의 속편 출연을 제안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영화 속에서 욕설과 마약 흡연 장면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였다. 대신 마이클 조던을 모델로 한 신발 브랜드의 탄생비화를 다룬 벤 에플렉 감독의 <에어>에서 하워드 화이트 역을 맡아 자연스러운 연기와 함께 건재한 입담을 뽐냈다.
▲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 같았던 성룡(오른쪽)과 크리스 터커는 <러시 아워>에서 의외로 환상의 호흡을 과시했다. |
ⓒ 뉴 라인 시네마 |
1980년 <배틀 크리크>,1981년 <캐논볼>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 진출했던 성룡은 이후 홍콩에서의 활동에 전념하며 아시아 최고의 액션배우로 군림했다. 그러던 1996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홍번구>가 < Rumble in the Bronx >라는 제목으로 북미에 개봉해 3200만 달러라는 쏠쏠한 흥행성적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성룡의 미국진출이 본격화됐다.
<리썰 웨폰>과 <탱고와 캐시>,< 48시간 >,<투캅스>,<나쁜 녀석들>,<와일드카드>,<청년경찰>,<걸캅스>까지. 공통점이라곤 찾기 힘든 개성 강한 두 형사가 파트너를 이뤄 사건을 해결하는 영화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 아워>처럼 흑인과 동양인 형사가 콤비를 결성하는 영화는 좀처럼 찾기 힘들었다. 성룡과 터커의 인지도가 크게 높지 않았음에도 <러시 아워>가 관객들에게 색다른 재미와 매력을 선사하며 크게 성공한 비결이다.
사실 <러시 아워>에서 카터 형사(크리스 터커 분)와 리 반장(성룡 분)의 역할은 확실히 구분돼 있었다. 납치된 영사의 외동딸이자 자신을 '사부'라고 부르는 소녀 수영(줄리아 수)을 구하기 위해 홍콩에서 파견된 리반장은 온갖 위험한 상황에도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적과 싸운다. 실제로 성룡은 <러시 아워> 출연 당시 이미 40세가 훌쩍 넘은 중견 배우였지만 북미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화려한 액션연기로 많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반면에 <러시 아워> 출연 당시 20대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던 젊은 배우 터커는 각종 수다와 개그장면들을 책임졌다. 카터 형사는 과묵한 리반장에게 '영어를 못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고 파견경찰인 자신이 'FBI'라고 거짓말도 한다. 영화에서 카터 형사는 관할구역의 전과자들과 대마초를 나눠 필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오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실제 크리스 터커는 마약과는 거리가 먼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1편에서 기대 이상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러시 아워>는 3년이 지난 2001년 제작비가 9000만 달러로 폭등한 속편이 개봉했다. 성룡과 크리스 터커로 이어지는 콤비는 물론 < 007 >시리즈의 본드걸에 해당하는 인물로 <와호장룡>을 통해 명성을 얻은 중화권 스타 장쯔이가 합류해 1편을 능가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다만 1억4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되며 스케일이 더욱 커진 3편은 2억5800만 달러의 흥행성적으로 투자대비 아쉬움을 남겼다.
▲ 영화 중반까지 조·단역에 불과했던 엘리자베스 페나는 영화 후반 인질이 입고 있던 폭탄을 제거하는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 |
ⓒ 뉴 라인 시네마 |
<러시 아워>에서 형사였던 카터의 아버지는 대낮에 교통정리를 하던 도중 펑크족이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당시 카터 아버지의 파트너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동료의 죽음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버지를 따라 형사가 된 카터가 '2인1조'라는 경찰의 기본수칙조차 지키지 않고 파트너 없이 혼자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이유다. 하지만 카터에게도 리반장이 나타나기 전까진 타냐 존슨이라는 조금은 덜렁대지만 유쾌한 여성 파트너가 있었다.
타냐는 영화 중반까지 동료들과 함께 카터 형사의 실수를 비웃는 조·단역으로 스치듯 등장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폭탄으로 된 조끼를 입은 인질 수영의 폭탄을 제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타냐를 연기한 엘리자베스 페나는 1987년 주제가가 더욱 유명해진 영화 <라 밤바>에 출연했고 2004년 애니메이션 <인크레더블>에서는 메인빌런 신드롬의 비서 미라지의 목소리 연기를 했다.
홍콩에서 리반장의 동료를 죽이고 미국으로 건너가 수영을 납치하는 범죄 조직원 상을 연기한 배우는 2002년 '연극·뮤지컬의 아카데미' 토니상을 수상했던 중국계 미국 배우 켄 렁이었다. <러시 아워>에서 성룡 못지 않게 날렵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상은 영화 후반 카터 형사와의 심리전 끝에 카터의 총에 맞고 사망한다. 켄 렁은 지난 2월에 개봉한 <서치2>에서 그레이스(니아 롱 분)의 새 남자친구를 연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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