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이스라엘, 하마스의 덫 피할 수 있나
어떤 대화는 오래 남는데 20년 전 이스라엘 청년 얘기가 그랬다. 군대 가기 전 여행 중이라던 그와 뉴질랜드 어디선가 스쳤다. 이스라엘에 있는 부모가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더라며 그가 한 말이다.
“사실 수시로 로켓 공격을 받으니 남들이 보면 훨씬 더 위험한 곳이 거긴데, 부모님은 나를 걱정한다. 아이러니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게 뭔지 아나. 우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전기고 식량이고 다 지원한다는 거다. 그러다 공격받으면 응징 차원에서 파괴한다. 곧 다시 지원하게 되고 공격받으면 또 파괴한다. 우리가 준 걸 우리가 부수고 또 주는 셈이다. 반복이다.”
20대 안팎이었는데 그의 표정은 세상의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본 듯 지쳐 보였다. 절감했다. 이스라엘-아랍, 아랍-이스라엘의 무한 갈등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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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마스 잔혹한 테러공격 뒤에는
이스라엘 대규모 보복 유도 목적
더한 혼란 낳지 않은 절제 있어야
」
기실 이스라엘은 인간 승리이자 인간 비극이다. 반복적 집단학살(pogrom)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건국’이란 정치실험에 성공했다. 100개국에서 온 이민자들을 받아들였고 여러 차례 멸실 위기를 이겨내며 다원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냈다. 짙은 그림자도 따랐다. 그곳에 있다 밀려난 팔레스타인인들이다. 이민과 식민(植民)은 양면이었다. 점령은 공분을 불렀고 공분은 폭력을 불렀다. 이스라엘 언론인 아리 샤비트는 2014년 이렇게 적었다. “우린 이스라엘을 다소간 캘리포니아처럼 생각하고 싶어 한다. 우리의 캘리포니아는 그러나 아야톨라로 둘러싸여 있다. (중략) 우리의 기적적 생존 얘기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한 세대 더? 둘? 아니면 셋? 칼을 쥔 손은 결국 느슨해진다. 칼도 결국 녹슨다. 어떤 나라도 백 년 넘게 창을 뾰족하게 세우고 주변 세계에 맞설 순 없다.”(『약속의 땅』)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보며 다시 무한 갈등의 골을 봤다. 사실 근래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과 평화를 원했다.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과 평화협정을 맺은 데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와도 목전에 뒀었다. 하지만 마치 팔레스타인 문제가 더는 문제가 아닌 양 외면했다. 이번에 그 값을 호되게 치렀다. 가자지구의 무장 정파 하마스가 틈을 파고들었다. 50년 전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시리아에 일격을 당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막대한 피해를 봤다. 방심했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 1973년 이집트의 사다트는 이스라엘과 평화를 맺기 위해 전쟁을 벌였지만,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파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민간인 학살과 납치·인질 이후 선전전에서 드러나듯, 하마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대규모 보복을 유도하는 것이다. “하마스는 무고한 팔레스타인인 수천 명이 ‘순교’하는 건 전 세계의 동정심을 얻기 위해 지불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전략가 빌 블레인) 집단이다. 지금이야 하마스의 잔혹함을 비판하지만 가자지구의 희생자 숫자가 늘어날수록 여론은 돌아설 것이다. 서안·헤즈볼라·이슬람 극단주의자들도 들썩일 것이다. ‘하마스의 덫’이다. 2014년 하마스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공격했을 때도 대부분 사람은 종국엔 하마스가 테러 집단임을 개의치 않게 됐다. 이스라엘 평판만 땅에 떨어졌다.
무고한 생명을 잃은 이스라엘로선 반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 어디서 멈출 것인가, 어떤 질서를 남기길 원하나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부디 분노에만 매몰되지 않길 바란다. 더한 혼란을 배태할 게 뻔하다.
끝으로 이 말도 해야겠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스라엘 엘리트의 무능 말이다. 특히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권력을 위해 극우파와 손잡고 그들의 목소리를 키워줬다. 팔레스타인을 더 자극했다. 최근엔 사법부 무력화 움직임으로 나라를 쪼개놓았다. 그가 이스라엘 미래에 끼친 해악이 크다.
하기야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우리도 극단의 목소리에 의지해 국정을, 정당을 이끄는 이들이 정치의 주역들이다. 피곤한 일이다.
고정애 Chief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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