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 역린 건드리는 필패의 수, 오만 [김성탁의 시선]
‘김행 임명 꼭 해야 한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야의 선거운동 상황을 전하는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렸었다. 비슷한 주장을 담은 글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이 제기됐고 급기야 ‘김행랑’이란 용어가 회자하던 상황에서다. 하지만 이런 댓글은 김 후보자의 임명에 찬성하는 취지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내용 때문이다.
‘상식과 동떨어진 발언을 해온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도 임명했는데 계속해야죠.’ 유인촌 문화체육부 장관을 포함해 후보자들의 재산이 매우 많다는 것을 빗대 ‘100억원 이상은 있어야 이 정부 장관 자격이 있는 것이지’라는 글도 보였다. 더 심각한 것은 ‘계속 마음대로 임명하세요. 내년 총선에 상대편 밀어 그들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할 테니…’라는 반응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진교훈 후보가 국민의힘 김태우 후보를 상대로 17.15%포인트 차이로 압승했다. 여권으로선 예상 밖 참패였겠지만 선거 과정에서 이상 신호가 이미 나타났다. 포털 등에 댓글을 쓰는 이들 중에는 강서구 유권자가 아닌 경우도 많았겠지만,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행태에 대한 반감이 컸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실책은 한국 유권자의 역린(逆鱗)을 간과한 데에서 비롯됐다. 역대 선거에서 승부를 가른 요건은 다양했겠지만, 특히 오만함을 보이는 정치 세력은 대부분 표로 응징받았다. 오랫동안 주요 선거를 경험한 정치인들이라면 정당을 불문하고 뼈저리게 아는 사안일 텐데, 과오가 반복된다. 주로 집권당에서 잦은데, 손에 쥔 권력이 판단을 가리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이 이번에 김 후보를 공천한 것 자체가 반면교사를 잊은 사례다. 2021년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는 여당이던 민주당 단체장들의 성추행 의혹 사건 때문에 치른 선거였다. 당헌에 따라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민주당은 당헌을 개정해 후보를 냈다. 결과는 참패였는데, 2020년 총선에서 174석이라는 거대 의석을 얻은 민주당의 오만이 원인으로 꼽혔었다. 보궐선거를 초래한 장본인인 김 후보를 공천한 여권이 다른 평가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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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행도 임명하라" 역설적 반응
'잠시 맡겨둔 권력' 잊으면 철퇴
역대 선거 보면 여든 야든 심판
」
문재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대를 보이고 여당이 거대 의석을 가졌음에도 지난 대선과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패한 원인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비대위가 꾸린 쇄신 자문기구는 “지지층에 안주하며 갖게 된 경직된 정책 노선과 오만한 태도”를 선거 패배의 핵심 이유로 꼽았다. 3000명을 온라인 조사하고 100여 명을 인터뷰한 보고서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로 이어지는 성공이 오히려 지지층의 확장성을 저해해 패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 정부가 깨달음을 얻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논란이 됐던 김행 후보자를 자진 사퇴 형식으로 정리하긴 했지만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선거의 승부는 여야의 충성 지지층이 아니라 30%가량에 해당하는 중도·무당층이 결정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들 눈에 오만하게 비치면 선거는 하나 마나다.
윤 대통령은 전임 정부를 빗대 줄곧 비교우위를 주장했다. 하지만 새롭게 시도했던 도어 스테핑을 그만둔 이후 기자회견 등을 하지 않는다.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생중계하는데, 이런 방식은 국민과의 소통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다지만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정부 대응에 불만족스럽다는 여론이 70%가량 나온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이 “1 더하기 1을 100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세력들과는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 인터넷에는 “내가 반국가세력인가?”라는 반응이 달렸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문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공산 전체주의’ 같은 표현을 써가며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윤 대통령의 발언도 계기나 배경을 국민에게 자세히 설명한 적 없다. 강성 지지층에게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나 스윙보터인 중도·무당층엔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지금 왜?” 같은 의구심을 던진다.
보궐선거 승리 직후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민주당의 승리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수 의석을 무기로 법안 처리 등을 강행하다 미운털이 박혀 정권을 내준 과거와 결별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오만한 권력을 심판하는 민심은 여와 야를 가리지 않는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권력을 쥐었다고 고개를 쳐들면 다음 선거에서 본때를 보이는 게 민심이다. 정치인들은 자주 망각하지만 산업화와 민주화 여정을 지나온 유권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권력을 잠시 맡겨둔 것임을.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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